고려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
현재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창작집,「처형의 땅」「새와 십자가」「내가 만난 여신」 절망과 기교」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 등
시집,「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 등
저서,「한국현대시사의 대외적 구조」「현대시의 이해」
감자밭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현대시학, 2006년 12월호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시집, 손님
폭설(暴雪)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宇宙의 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어머니
어머니,
요즘 술을 많이 마시고 있읍니다
담배도 많이 피웁니다
잘못했읍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읍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잊지 않겠읍니다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겠읍니다
어머니!
잠지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 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한 밥 얻어먹겠네
시집, 벙어리 장갑, 문학사상사
영희 누나
내가 백운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나의 담임교사로 부임해 왔다
내 생애의 한복판에 민들레꽃으로 피어서
배고픈 열한살의 나를 숨막히게 했다
멀리 솟은 천등산 아래 잠든 마을에
풍금을 잘 치는 예쁜 여교사가 왔다
어느 날 하교길에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며
들국화 한 송이 가리키듯 나를 손짓했다
탁번아 너 내 동생되지 않을래?
전쟁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오빠도 군대에 가서 나는 너무 외롭단다
선생님이 누나가 되는 정말 이상한 날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
송화가루 날리는 봄언덕에서
나는 산새처럼 지저귀며 날아올랐다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누나다 영희누나다
가을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와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
영희누나한테 착한 어린이가 되지 못한 날은
꿈속에서 벌서며 오줌을 쌌다
시집, 겨울강, 세계사
요즘의 연구과제
요즘 나의 연구과제는 오탁번이다
오탁번의 역사인식과정에 대한 고찰
오탁번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물론 지금 다른 글을 쓰는
낯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풀도 아니다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작은 곤충으로 아주 희귀하게 발견된다
천둥산 박달재 오리나무 가지 끝이나
치악산 산매미 울음소리 사이에서
실잠자리 겹눈에나 잠깐 뜨인다
너무 희귀해서 곤충도감에 수록된 적이 없다
채집할 가치가 없으므로 곤충학자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눈깔과 뿔과 주둥이의 모양이
잠자리 같고 하늘소 같고 쇠똥구리 같다
다리가 땅을 파고 뛰기를 하는 데 알맞은 건
딱정벌레와 비슷하지만
갑옷과 고운 날개가 없는 걸 보면
동물 중에서 가장 종류가 많은 딱정벌레는 아니다
성충이 되어서도 유충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고
어둠이 풀섶에 내리면
화학적인 에너지를 완전히 빛으로 바꾸어
같은 종의 짝을 찾는 신호를 보내는
개똥벌레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불빛이 너무나 작아서
어느 여자도 어떤 학자도 눈치채지 못한다
쇠똥을 떼어내어 둥글게 다진 다음
식량으로 갈무리하면서
그 속에 알을 낳고 싶어한다
아 오탁번은
아직 채집되지 않은
너무나 작고 눈에 안띄는 벌레다
쇠똥 속에 집을 짓고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역사인식의 눈빛
개똥 같고 쇠똥 같은 불빛을 발산한다
내가 오탁번의 성충으로 직접 변태하기 전에는
그놈의 역사인식과정을
명쾌히 밝힐 실험도구가
나에겐
아직 없다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매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시선, 2006 겨울호 [시와 농담]
엘레지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산밭에서
가파른 산밭을 매면서 아낙네들은 말했다
매일 이 지경으로 일을 하면
밑구녁도 아예 비뚤어지겠다
건너 산에선 뻐꾸기가 울다 졸다 하였다
밭두럭에선 암소가 제 새끼의 사타구니를
뜨거운 혀로 자꾸자꾸 빨았다
가파른 산밭을 매면서 아낙네들은 말했다
서방이 제 구멍을 못 찾으면 낭패다
밤눈 밝기는 그중 밝으니 괜한 말이다
옥수수 자루가 수염을 날리며 웃었다
돌멩이와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치는
호미 소리에 뻐꾸기도 암소도 웃었다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사랑의 깊이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둠의 깊이만큼 비애가 끝간 데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젖어드는 그리움의 얼굴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천둥 번개 요란한 새벽마다 눈을 뜨고
너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알몸에 알몸을
가까이하고 여름 여치가 날개를 비벼대며 울 듯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의 깊이만큼 우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나는
너의 흰 손 흰 이마 가슴 적시는 눈물 방울
응가
어린 아기 똥누듯
냄새 풍기면서도 예쁜 것이 詩다
젖몸살 앓는 엄마의 아픔처럼
눈물과 미소가 얽힌 것이 詩다
홍등가에서 사랑을 파는 여자들의
곪았지만 자꾸 파들어 가고 싶은 어둠이
그 냄새 나는 절망이 예술이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보잘것없어도 생선가시마냥
뭔가 목구멍에 걸리는 주제가 있을까
깜부기처럼 새까맣게 목숨 태워서
거름더미에도 못 얹히는 신세가 되어
미친 돼지도 안 먹는 주검이 되어
그 많은 가운데 하나도 못 되는
캄캄한 어둠이고 싶다
빙어에게
간이주점 때묻은 식탁
큰 유리대접 안에서 헤엄치는
빙어
오늘 아침까지도 의림지 깊은 물 속에서
산란의 꿈을 꾸던
빙어
한 마리에 3백원씩 주고
열 마리를 산 채로 먹다
젓가락으로 대가리를 꼭 집어서
고추장에 찍어 입 안에 넣다
빙어
미안해 잘가 안녕
의림지 깊은 추억 속에서
너는 신라 때부터의 내력으로
얼음처럼 차고 맑은 몸으로
몇 백년의 세월을 이어왔지만
지금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흐리다
꽃샘바람
더 춥게 불다
1년살이 꿈이
헤엄칠 때마다
빙어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땅거미 진 고개를 올라서며
내가 나를 죽인다
염치도 없는
대가리를
매운 고추장에 처박는다
빙어 사랑해
안녕
춘일春日
풀귀얄로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봄산
오요요 부르면
깡종깡종 뛰는
쌀강아지
산마루 안개를
홑이불 시치듯 호는
왕겨빛 햇귀
시안, 2005 봄호
죽음에 관하여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오탁번-눈물 한 방울
바다 건너에 간 미영이
밤중의 너의 목소리가
오늘 아침 여기 날아와
교수 5호봉 문학박사
시인 소설가의 귀밑머리
울리는데 자꾸 날리는데
진달래 피던 봄날 찍었던
5 X 7 짜리 칼라 사진 한 장
깨끗한 너의 기호는
희나비처럼 날아와 나를
간지럼 태우지만 허전한 눈물
한 방울 보고 싶은 마음
바다 건너 짝을 찾아 떠난
사랑하는 교육학과 1 학년생
너에게 한 잎사귀에 싸서
보내고 싶다 이만 총총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껄껄걸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똥냄새도 안 나는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좋게 났던가
이따위 추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걸레처럼 살면서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벙그는 난초꽃의 고요 앞에서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을
쓰고 있을 때
내 마빡에서 별안간
'네 이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만 연필이 딱 부러졌다
손에 쥐가 났다
벙어리장갑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시집, 벙어리장갑, 문학사상사 2002
카마수트라의 힌두 사내
벌거벗은 녀석 제 물건 곧추 세우고
침상 위에 점잖게 누워 있다
머리맡에는 알몸의 하녀가
녀석의 머리를 젖가슴으로 받치고 있다
또 다른 하녀가 발치에 서서
시렁 위로 연결된 줄을 당기면
잘 생긴 나체의 부인이 망태를 타고
도르래처럼 시렁 위로 올라간다
메주덩이 매달린 시렁 밑에서
막내아들 만들던 아버지 생각난다
하녀가 도르래 줄을 풀면
서방을 하늘처럼 섬기는 부인이
호박보다 더 큰 젖가슴을 하고
터번 쓴 사내의 물건 위로 정확히 낙하한다
막내를 낳고는 젖이 말라 붙은 채
디딜방아에 겉보리 찧던 어머니 생각난다
메기수염을 한 힌두의 사내는
인도대륙의 잘 생긴 여인을
망태에 죄다 담고나 싶은 지
메기웃음 지으며 물건을 뽐낸다
*카마수트라 -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고대 인도의 性愛에 관한 경전
시안, 2000년 겨울호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 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 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돌
연못가에 돌 하나를 갖다 놓았다
다 썩은 짚가래 같이 어둡기도 하고
퇴적되어 오묘한 결과 틈이
꼭 하느님이 지시다 만 시루떡 같은
충주댁 수몰지역에서 나왔다는 돌,
어느 농가 두엄더미에 무심히 서 있다가
몇 십 년 만에 수석쟁이의 눈에 띄어
수석가게 뜰에서 설한풍 견디던 돌,
이끼와 바위솔이 재재재재 자라고
나무뿌리도 켜켜이 엉켜있다
화산과 지진이 지구를 뒤덮고 난 후
태고의 적막을 가르며 달려온 돌,
비 오면 비에 젖고 눈 오면 눈에 맞는
지 아무렇지도 않은 껌껌한 돌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일은 쏠쏠하기만 한 데
물을 주고 금세 파랗게 살아나는 이끼!
검버섯 많은 내 몸에도
무심결에 파란 이끼나 돋아나면 좋겠다
현대시학, 2005년6월호
우화羽化의 꿈
대나무를 기르는 사람이
영 대쪽같지 않고
난을 기르는 사람이
난커녕 잡초 되어 살아가는
한 많은 한세상
나의 삶이 끝나면
블랙홀 근처
조선 소나무 가지 위에
나는 매미나 한 마리 되어
맴맴맴
우주가 떠나가도록
울어는 보고 싶다
시집, 벙어리장갑, 문학사상사
애기똥풀
1
개구리밥 자라는 둠벙가에서
눈 깜박이며 살레살레 고개젓는
애기똥풀의 가녀린 꽃잎 위로
문득 떠오르는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아직 눈도 못 뜬 내 사타구니에
새끼자라의 연한 살결 간지럼 태우며
애기똥풀 柑黃빛 꽃물 발라주던
누나의 눈웃음이
봉숭아물 곱게 든 손톱만큼 예뻤다
둠벙도 먼 강물도 꿈꾸지 못하는 나에게
누룽지처럼 맛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마련해 주고 떠난
누나여
2
새끼자라가 눈을 뜨고 둠벙에서 나와
흐린 강물 헤엄치며 불러보아도
이젠 영영 보이지 않는
땀방울 송송 맺히던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간장종지만한 젖가슴도
쥐이빨 옥수수 같은 앞니도
세상의 바람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추억의 빈 공책 빛바랜 페이지에서
옹알옹알 속삭이며
그때 그 어린 눈망울로
내 사타구니의 다 큰 자라가 미운 듯
말똥말똥 눈흘기는 애끼똥풀이여
누나여
끈끈이주걱
뒷개울 건너 공동묘지 가는 길은
작은 벌레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흰 꽃이
고수레 밥풀처럼 하얗게 피었다
낙향한 선비의 콧수염 같은
제비붓꽃이
촉루가 된 주검들의 보랏빛 사연을
하늘 멀리 띄울 때
하루살이 애벌레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홍자색 털이
내 어린 종아리에 자꾸 달라붙었다
하늘이 오리알 빛으로 물들 때면
끈끈이주걱에게 잡아먹힌
이름 모를 벌레들의 영혼이
송장메뚜기 뛰어오르는 풀섶에서
동글동글한 열매로 익어
껍질을 터뜨리고 길섶에 흩어졌다
서리병아리 울음 따라 가을이 깊고
긴 겨울 지나 봄이 돌아오면
보리누름은 아직도 먼데
쌀뒤주는
바닥이 났다
뒷개울 건너
공동묘지 가는 길은
끈끈이주걱이 어지럽게 피었다
나도 한 마리 벌레가 되어
밥주걱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살고 싶었다
흰 쌀밥
여름 내내 냠냠 먹다가
통통하게 살찐 벌레의 영혼이 되어
이승의 하늘 아래
깜장 열매로 흩어지고 싶었다
시집, 1미터의 사랑(시와 시학사)
그대의 별자리
비상등 켜고 전조등 밝혀도
그대가 가는 길 보이지 않는다
네거리에 가까스로 왔지만
직진해야 하는지 우회전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황도 십이궁도 광막한 어둠에 싸여
전갈자리인지 사자자리인지
북극성 곧바로 보이는
오리온자리인지
분별할 수가 없다
길은 뚫린 곳에서 스스로 막힌다
내 생애의 길은
저 혼자 시간의 강물로 빠지며
내 마음의 길을 지워버린다
장마
푸렇게 일어서는 천둥산의 아침
예배당의 지붕 위에서
귀 달린 구렁이가 꿈틀거린다
돌담의 냄새 옆에는
푸득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
여름벌레들이 떨어져 흘러간다
산수숙제는 정말 어려웠다
순이의 몽당연필도
곤두서서 산으로 뛰어가고
모두 다 입을 다물고
벌레가 개울을 이룬다
얼마 곱하기 얼마는 얼마
얼마 곱하기 얼마는 얼마
아침은 발목까지 빠져서
다 젖는다 다 젖는다.
귀를 앓은 구렁이가 기어다닌다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쥐에 관한 명상
민박집 천장에서 쥐 달리는 소리 들리면
참말 오랜만에 동갑내기 만난 것 같다
쥐불놀이 하다가 눈썹 태우고
시래기죽 먹고 잠든 겨울밤
쥐불연기에 수염을 그슬린 쥐들이
눈썹 태운 나와 더 놀고 싶다는 듯
쥐오줌자국 난 천장을 밤새 달렸다
씨옥수수 갉아먹던 새앙쥐들도
이불 속까지 기어 들어와
내 어린 발가락을 자꾸 깨물었다
고드름이 제 무게에 툭툭 떨어지는
아침이 밝아 오면
내 꿈길까지 따라오며 보채던 쥐들은
일곱 문 반 내 고무신에
봉숭아씨처럼 예쁜
쥐똥만 남겨 놓고 숨어 버렸다
쥐 달리는 민박집 천장 아래 누우면
옛 동갑내기의 발자국소리 들린다
하관(下館)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저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튓마루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선운사에서
1
선운사 입구
민박집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먹는
토실토실한 암탉도
나팔꽃 우산 쓰고 선운사 찾아가는
어린 여학생들의 맨종아리도
다 선운사 기운을 빼다 박았다
암탉이 갓 낳은 피묻은 달걀이나
송곳니로 톡톡 구멍 내어
쭉 빨아 먹어봤으면
솜털 보송보송한 뺨이나
그냥 한 번 만져봤으면
2
동백꽃은 다 떨어져
서녘 바다로 흘러가고
빽빽한 동백숲이
엿 먹어라 엿 먹어라
헛손뼉을 친다
금동불상 앞에 합장은 하지 않고
해우소에 들러
근심걱정 모두 버린다
똥오줌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비 오는 선운사에서
내 몸도 모두 버린다
나는 이제 몸이 없다
간절한 생각뿐이다
여류신인의 일기장에서
1
그 순간 제철소의 용광로가 보였다 대장간이 보였어 풀무 속에서 이글거리는 시우쇠처럼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내 몸으로 파고들어왔어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소리치면서 나는 그 순간 죽고 싶었어 아니 아니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정말 고마웠어 시뻘건 쇠막대기 이글거리며 내 영혼으로 파고들어올 때 나는 내 몸뚱이가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
2
갈대밭이 바람에 마구 쓰러지고 있었어 멀리 멀리 바다소리 내 귓가에서 출렁거렸어 솨솨솨 갈대잎 흔들리는 소리가 내 몸에서 터져나왔어 소금기 비릿한 파도소리에 나는 죽고 싶었어 아니 아니 그 순간 오래 오래 살고 싶었어 내가 자살하면 내 몸뚱이가 소멸된다는 게 너무 슬펐어 하지만 자살 말고 순간을 영원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 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 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우표 한 장의 행복
오늘 나는 170원을 공짜로 벌었다
회신용 우표를 동봉하여 배달되는
그렇고 그런 우편물이 가끔 있는데
회신 안해도 되는 것들이 많다
인물백과사전을 내는 출판사나
데이터뱅크를 차려놓고
시인 작가와 대학교수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신문사나
여론조사를 하는 단체에서
회신용 봉투에 우표를 붙여서 보내지만
나는 우표만 뜯어내어
요긴할 때 써먹는다
더듬이가 예쁜 물방개 우표는 100원
늦털매미 우표는 150원
하늘거리는 수선화는 130원
오늘은
조선백자 그림이 예쁜
170원자리 우표를 공짜로 얻었다
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내 마음 모두 전해줄 우표를
침 발라가며 잘 뜯어내어
지갑 속에 넣었다
나는 아주 기분이 좋다
퇴근길에
생맥주 500cc 마셔야겠다
그냥커피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를 마시는 토요일 오후
산자락 옹긋옹긋한 무덤들이
이승보다 더 포근하다
채반에서 첫잠 든 누에가
두잠 석잠 다 자고
섶에 올라 젖빛 고치를 짓듯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 마시며
저승의 잠이나 푹 자고 싶다
타지마할
이맘때쯤 다시 만나기로 하자
이제 여기서 헤어지고 나면
가을 깊어가고 겨울이 오고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야무나강이든 갠지스강이든
저 멀리 남한강이든
그 강물 흘러가는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손톱 밑으로 빠져나가는
시간의 햇살따라
벵골만 건너 캘커타 지나
아그라 붉은 태양 아래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타지마할
죽은 다음에도 되살아나는
왕과 왕비의 살냄새 거웃냄새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타지마할의 눈부신 대리석 위에
보름달이 솟을 때
여기쯤에서 만나기로 하자
사랑에는 꼭 이별이 있는 법
저승의 푸른 하늘 아래
대리석이나 오동나무 관이 아니면
관솔구멍이 숭숭 뚫린
소나무 관 속에
금은보화 비단옷이 아니면
무명옷이나 삼베옷 두르고
그도저도 아니면
청바지 차림으로라도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우리들 사랑이 타지마할에서
이맘때쯤 다시 꼭 만나기로 하자
강설(降雪)
외출의 발 끝에 내리는 겨울 흰빛 휴지부(休止符),
공상(空想)을 한컵 마시고 나온 나를
세종로 한복판에 토해 놓고
버스는 시간의 노선 위로 달아나 버렸다
서류와 기름끼 등 이런 것들을 차려입고
강한 자들은 기관의 정문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들을 신고하는 시민에게
검거해낸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수사관에게
내 포케트에 든 공상(空想)의 음료를 주고
약한 자여
너희들은 지금 휴지부(休止符)를 집어들지만
너희들 본능의 체온 때문에라도
흰빛 겨울은 수포(水泡)가 되고
다시 난해한 곳으로 승차하기 직전
세종로는
가벼운 신(神)의 완구(玩具)가 덤핑으로 판매되는
흰 시장이 되었다
내 의식의 점포 안에도
겨울의 본능은 하강(下降)하고
약자들의 흰 빛 거래가 활발해진다
동해 설송
소나무 가지에 내린 눈이
먼 파도 소리에 잠을 깨는
입춘날 아침,
대관령이
흰 수염 쓰다듬으며
굽은 허리를 펴고
동해 바다는
푸른 치마폭 펼쳐서
소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담고 있다.
꽃모종을 하면서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오줌이 마렵지 않은데 예쁜 여자애 알아보고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구말구 아뻐 꼬추도 오줌이 마렵지 않아도 커질 때가 있단다 개구장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구슬소리 영롱하게 짤랑대면서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조그만 우리집 꽃밭에 봉숭아 꽃모종을 하려고 나는 다시 허리를 구부렸다
방아타령
-여보, 카섹스가 뭐래유?
요즘의 성풍속이 TV에 방송되자
계집이 사내에게 물었다
-병신, 자동차 안에서 방아 찧는 것도 몰러?
마당의 모깃불이 시나브로 사위어갔다
이튿날 사내는 계집을 경운기에 태우고
감자밭으로 감자 캐러 나갔다
산비둘기가 싱겁게 울고
암놈 등에 업힌 메뚜기는
뙤약볕이 따가워 뺨 부볐다
-여보, 우리도 카섹스 한 번 해 봐유
-뭐여?
-경운기는 차 아니래유?
사내는 경운기를 냅다 몰았다
계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소쿠리 가득 감자를 캐면서
계집이 사내를 핼긋핼긋 할겨보았다
-저, 병신
사내는 욕을 하며
구들장보다 뜨거워진 경운기에
계집을 태웠다
시와반시, 2003 가을호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삼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고욤나무
갑사 들어가는 아름드리 숲길에서 문득 만난
키만 싱겁게 큰 비쩍 마른 고욤나무 한 그루
잎사귀도 고욤도 없이 빈 손 하늘까지 펴고
계룡산 깊은 울음소리 염주알처럼 헤아린다
봄 여름 다 보내고 단풍잎 어지러운 하늘에
꿈속에서도 그리운 뺨 눈물 머금은 저녁노을
고욤나무의 적막한 꿈이 가지 끝에 이울고
부처님의 금빛 손가락 목탁소리에 무심하다
고란사에서
고란사 뒤안 절벽 바위 틈에서
한사코 몸을 숨기는
눈썹만한 그대여
낙화암 푸른 절설 다 안다는 듯
천년 묵은 소나무는
굵은 뿌리를 바윗가에 드러내고
강물결 춤출 때마다
금빛 솔잎 따갑게 흔들리는데
눈씻고 보아야
겨우 눈에 띄었다가는
햇빛 비치면 다시 몸을 숨기는
고란초여
이제는 다 흘러가버린
천년 전의 사랑
아직도 못 잊겠다는 듯
그늘에 숨어서도
제 모습 부끄럽다 하네
비에 젖은 눈썹 훔치며
목숨과 바꾼 사랑
남 몰래 속삭이고 있네
내 줌렌즈에 잡히는 피사체
-빙하기를 기다리며6
첫 새끼 낳은
알몸이 고운 암고래가
동해의 푸른 파도를 가르며
뽀얀 젖을 뿌리면
태생의 피 그냥 젖은 사랑이
아늘아늘 물보라 속에 피어난다
1억 년 전 퇴적암 위에
발자국 화석으로만 남은
난생의 사랑이
영원을 가르며 날아갈 때
짝을 찾는 개개비 한 마리가
개개개 울음 운다
어미가 뿌려 놓은 젖을 먹으며
아기 고래는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포란의 꿈이
가뭇한 젖꼭지마냥
곱다랗다
영하가 긴 잠에서 깨어나
지구의 결빙을 음모할 때도
눈도 못 뜬 새끼들에게
어미새가 토해주는 사랑이
불잉걸보다 뜨겁다
천등산
천등산은 밤이 되면 等高線이 부풀어올랐다
그해 여름 병정들의 삼륜 오토바이가
밤마다 키가 크는 천등산 고개를 넘어갔다
병정들은 천등산 속으로 들어가 山이 되었다
자작나무처럼 얼굴이 흰 진외육촌형도
천등산 속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가으내 천등산에는 산불이 났다
하늘로 퍼져오르는 자작나무 타는 연기가
진외육촌형이 흔드는 흰 손수건 같았다
어휘에 관한 명상
아무리 외워도 늘 소용없다
가로 세로 언제나 헷갈려서
라디오를 켤 때 안테나가
가로로 올라가는지 세로로 올라가는지
밀물 때 조개를 캐는지 썰물 때 캐는지
제부도 바닷길이
물보라 속으로 잠길 때가
밀물 때인지 썰물 때인지
정말 모르겠다
pull에서 밀고 push에서 당기고
르네쌍스 호텔 커피숍에 약속이 있는 날
무거운 문 밀고 들어가다가
그만 또 헷갈린다
pull이라고 써 있는데도
문을 힘주어 밀다가 서양인한테 들키면
국위손상이 되고 벌금도 내는 것 아닐까?
내가 바보일까?
중학교 때 가끔씩 1등도 했었는데?
첫사랑 여자의 왼쪽 눈썹 위에
주근깨가 다섯 개 있던 것도 기억하지만
가로 세로 밀물 썰물 pull push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다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는
위에서 아래로 놓인 상태라야 되는지
옆으로 된 방향이라야 되는지
당겨야 할지 밀어야 할지
밀물처럼 하는지 썰물처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가로? 세로? 밀물? 썰물? Pull? Push?
이 간단한 어휘들이 내 앞에 와서는
왜 해체되어 무의미가 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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