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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폭설(暴雪)_오탁번

등경 2014. 12. 14. 08:57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 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 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소잉!


오탁번·(1943~ ) 충북 제천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시집 보내다』 외 다수가 있음.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201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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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딱 외우기 좋은 시다. 내가 시를 암송하기 시작하게 된 동기는 지난해 연수원에서 있는 연수 중 1일 체험학습으로 담양에 있는 가사문학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곳에 계신 해설사이신 이정옥 위원꼐서 정철의 사미인곡 등 여러 시를 외우는 데 이 시로 우리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시도 이렇게 웃길 수 있구나 생각하고 좋은 시를 외워보기로 도전하다. 오늘 아침 떠듬거리면서 아내에게 욕을 좀 할 거니까 참으라고 하고 외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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