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 모음
대숲 아래서
-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외할머니
시방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오나오나 해서
흰옷 입고 흰버선 신고
조마조마
고목나무 아래
오두막집에서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물렁감도 따다 놓으시고
상수리묵도 쑤어 두시고
오나오나 해서
고갯마루에 올라
들길을 보며
조마조마 혼자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시방도 언덕에 서서만 계실 것이다,
흰옷 입은 외할머니는.
어머니 치고 계신 행주치마는
어머니 치고 계신 행주치마는
하루 한 신들 마를 새 없이,
눈물에 한숨에
집뒤란 솔밭에 소리만치나 속절없이 속절없이…….
봄 하루 허기진 보리밭 냄새와
쑥죽먹고 짜는 남의 집 삯베의
짓가루 냄새와 그 비린내까지가
마를 줄 몰라, 마를 줄 모라.
대구로 시집간 딸의 얼굴이
서울서 실연하고 돌아와 울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박혀 눈에 가시처럼 박혀
남아 있는 채,
남아 있는 채로…….
이만큼 살았으면
기찬 일 아픈 일은 없으리라고
말하시는 어머니, 당신은
오늘 울고 계시네요
어쩌면 그렇게 웃고 계시네요.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달밤
어수룩히 숙어진 무논 바닥에
외딴집 호롱불 깜박이는
산이 내리고
소나기처럼 우는
개구리 울음에
물에 뜬 달이 그만 바스라지다.
달밤.
안개는 피어서 꿈으로 가나,
물에 절은 쌍꺼풀눈
설운 네 손톱을,
한 짝은 어디 두고
홀로이 와서
입안에 집어넣고 자근자근 씹어주고 싶은
네 아랫입술 한 짝을,
눈물 아슴아슴
돌아오는 길.
어디서 아득히 밤뻐꾸기 한 마리
울다말다 저 혼자도 지치다.
나 혼자 이슬에 젖는 어느 밤.
천천히 가는 시계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고 싶다.
어쩌다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있다 가고 싶었는데
아는 듯 모르는 듯
잊혀지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대 가슴에 못을 치고
나의 가슴에 흉터를 남기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의 고집과 옹졸
나의 고뇌와 슬픔
나의 고독과 독선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과연 좋은 것이던가
사는 듯 마는 듯 살다 가고 싶었는데
웃는 듯 마는 듯 웃다 가고 싶었는데
그대 가슴에 자국을 남기고
나의 가슴에 후회를 남기고
모난 돌처럼 모난 돌처럼
혼자서 쓸쓸히.
겨울 연가
한겨울에 하도 심심해
도로 찾아 꺼내 보는
당신의 눈썹 한 켤레.
지난 여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것들.
움쩍 못하게 얼어붙은
저승의 이빨 사이
저 건너 하늘의 한복판에.
간혹 매운 바람이 걸어 놓고 가는
당신의 빛나는 알몸.
아무리 헤쳐도 헤쳐도
보이지 않던 그 속살의 깊이.
숙였던 이마를 들어 보일 때
눈물에 망가진 눈두덩이.
그래서 더욱 당신의 눈썹 검게 보일 때.
도로 찾아 드는
대이파리 잎마다에 부서져
잔잔히 흐느끼는
옷 벗은 당신의 흐느낌 소리.
가만가만 삭아 드는 한숨의 소리.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몸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 준다
두 이름
어머니란 이름은 네모지고 엄마란 이름은 둥글다 어머니란 이름은 딱딱하
고 엄마란 이름은 말랑말랑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엄마란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였을 뿐, 할머니를 할매라 부르며
자랐다 그것도 외할머니를 그렇게 부르며 자랐다 그러나 끝내 할머니 속에
는 엄마가 없었고 어머니 속엔 할매가 없었다. 그 두 이름 사이를 오가며
어린 나는 자주 어리둥절했고 때로 미달한 마음과 섭섭한 마음 아스므레
애달픈 마음을 살았다 하나의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 이름이 있는 것
은 불행한 일이며 불완전한 둘보다는 완전한 하나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첫차
낯선 고장 낯선 여관방에서
하루 밤 묵고 일어나
깨끗한 이부자리에게 감사하고
밤새도록 선잠 든 얼굴 비춰준
전등불에게 감사하고
푸석한 얼굴 씻어줄 맑은
수돗물에게도 마저 감사한다
이 새벽아침에도 따끈한 국물을 파는
밥집이 열려 있었구나
밥을 먹으면서도 감사하고
깍두기를 씹으면서도 감사한다
지금껏 내가 사랑한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새삼스럽지 않은 깨달음에도 짐짓
소스라치며 진저리치며
어둠을 뚫고 가는 자동차에게 감사하고
운전기사에게도 감사해야지
나 오늘도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첫차로 떠난다
세상 속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노(櫓)
아들이 군에 입대한 뒤로 아내는 새벽마다 남몰래 일어나 비어있는 아들방
문앞에 무릎 꿇고 앉아 몸을 앞뒤로 시계추처럼 흔들며 기도를 한다
하느님 아버지, 어떻게 주신 아들입니까? 그 아들 비록 어둡고 험한 곳에
놓일지라도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채금져 주옵소서
도대체 아내는 하느님한테 미리 빚을 놓아 받을 돈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수금해주실 일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계속해서 채금(債金)져 달
라고만 되풀이 되풀이 기도를 드린다
딸아이가 고3이 된 뒤로부터는 또 딸아이방 문앞에 가서도 여전히 몸을 앞
뒤로 흔들며 똑같은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아버지, 이미 알고 계시지요? 지금 그 딸 너무나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오니 하느님께서 그의 앞길에 등불이 되어 밝혀주시고 그의 모든
것을 채금져 주옵소서
우리 네 식구 날마다 놓인 강물이 다를 지라도 그 기도 나룻배의 노(櫓)가
되어 앞으로인 듯 뒤로인 듯 흔들리며 나아감을 하느님만 빙긋이 웃으시며
내려다보시고 계심을 우리는 오늘도 짐짓 알지 못한 채 하루를 산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창문이 덜컹댑니다
어느 먼 땅에서 누군가 또
나를 생각하나 봅니다
바람이 붑니다
낙엽이 굴러갑니다
어느 먼 별에서 누군가 또
나를 슬퍼하나 봅니다
춥다는 것은 내가 아직도
숨쉬고 있다는 증거
외롭다는 것은 앞으로도 내가
혼자가 아닐거라는 약속
바람이 붑니다
창문에 불이 켜집니다
어느 먼 하늘 밖에서 누군가 한 사람
나를 위해 기도를 챙기고 있나 봅니다.
선물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 하루가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서럽게 서럽게 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았다면 그 또한 선물입니다
한낮의 햇살 받아 손바닥 뒤집는
잎사귀 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이고
길 가다 발 밑에 깔린 이름 없어 가여운
풀꽃들 하나 하나도 선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해도 부디
마음 아파하거나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마서요
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 하며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새로운 길
나는 신문을 한 1년쯤
묵혔다 읽는다
어떤 때는 2, 3년, 더한 때는
10년이 지난 신문을 읽을 때도 있다
그렇게 읽어도 새로운 소식을
담은 신문이 내게는 정말로
신문이 될 수 있기 때문
나는 남들이 새로운 길이라고 소리치며
달려가는 길은 가지 아니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왁자지껄 그 길을
걸어서 멀리 사라진 뒤
그 길이 사람들한테 잊혀질 만큼 되었을 때
그 길을 찾아가 본다
그런 뒤에도 그 길이 나에게
새로운 길일 수 있다면 정말로
새로운 길일 수 있기 때문
나에게 새로운 길은 언제나
누군가에게서 버림받은
풀덤불에 묻힌 낡은 길이다.
다락방
이담에 집을 마련한다면
지붕 위에 다락방 하나 달린 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틈으로 하늘 구름도 잘 보이고
바람의 옷소매도 잘 보일 뿐더러
밤이면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는
그러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속상하거나 답답한 날은
다락방에 꽁꽁 숨으렵니다.
그대도 짐작 못하고
하느님도 찾지 못하시도록.
강물과 나는
맑은 날
강가에 나아가
바가지로
강물에 비친
하늘 한 자락
떠올렸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
흰구름 한 송이
새소리도 몇 움큼
건져 올렸습니다
한참동안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기르다가 공연스레
죽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강가로 나아가
그것들을 강물에
풀어 넣었습니다
물고기와 흰구름과
새소리 모두
강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날부터
강물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태주
충남 서천 출생
공주사범학교 졸업
1971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1979 제3회 흙의 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저서명 부서명 총서명 출판사 출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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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대숲 아래서> 예문관 1973
시집 <누님의 가을> 창학사 1977
시집 <모음(母音)> 창학사 1979
시집 <막동리 소묘> 일지사 1980
산문집 <대숲에 어리는 별빛> 1980
시집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일지사 1981
시집 <구름이여 꿈꾸는 구름이여> 일지사 1983
시집 <변방> 신문학사 1983
시집 <외할머니> 신문학사 1984
시집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일지사 1985
시집 <굴뚝 각시> 오상사 1985
시집 <목숨 비늘 하나> 영언문화사 1987
시집 <아버지를 찾습니다> 정음사 1987
시집 <우리 젊은날의 사랑> 청하 1987
시집 <빈손의 노래> 문학사상사 1988
시집 <추억이 손짓하거든> 일지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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