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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태주 시 모음 3

등경 2014. 11. 30. 14:35

* 선물 1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구절이면

한아름 바다를 안은 기쁨이겠습니다 *

 

* 돌멩이  

흐르는 맑은 물결 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 일렁이는

얼룩무늬 돌멩이 하나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야지

집어 올려 바위 위에

놓아두고 잠시

다른 볼일보고 돌아와

찾으려니 도무지

어느 자리에 두었는지

찾을 수 없다


혹시 그 돌멩이, 나 아니었을까 * 

 

* 꽃이 되어 새가 되어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날마다 하루해는 사람들을 비껴서
강물 되어 저만큼 멀어지지만

 

들판 가득 꽃들은 피어서 붉고
하늘가로 스치는 새들도 본다 *

 

* 지상에서의 며칠
때 절은 조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줌이었다가
바람 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바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기약 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 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었지
그리고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빨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 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

* 나태주시선집[지상에서의 며칠]-시월

 

* 몽당연필
초등학교 선생 할 때
아이들 버린 몽당연필들
주워다 모은 게 한 필통 가득이다

상처 입고 망가지고
닳아질 대로 닳아진 키 작은 녀석들
글을 쓸 때마다 곱게 다듬어
볼펜 깍지에 끼워서 쓰곤 한다

무슨 궁상이냐고
무슨 두시럭이냐고 번범이
핀잔을 해대는 아내

아내도 나에게 하나의 몽당연필이다
많이 닳아지고 망가졌지만
아직은 쓸모가 남아있는 몽당연필이다

아내 눈에 나도 하나의
몽당연필쯤으로 보여 졌으면
싶은 날이 있다 *

 

* 꽃잎

활짝 핀 꽃나무 아래서

우리는 만나서 웃었다


눈이 꽃잎이었고

이마가 꽃잎이었고

입술이 꽃잎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셨다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고

그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와 사진을 빼보니

꽃잎만 찍혀 있었다 *

 

* 귀소(歸巢)  
누구나 오래
안 잊히는 것 있다

낮은 처마 밑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던
생솔가지 태운 냉갈내며
밥 자치는 냄새

누구나 한번쯤
울고 싶은 때 있다

먹물 와락
엎지른 창문에
켜지던 등불
두세두세 이야기 소리

마음 먼저
멀리 떠나보내고
몸만 눕힌 곳이 끝내
집이 되곤 하였다 *   
*냉갈내 ― 식물성 연료를 태우는 아궁이에서 나는 냄새

 

* 숲

비 개인 아침 숲에 들면

가슴을 후벼내는

비의 살내음

숲의 샅내음


천 갈래 만 갈래 산새들은 비단 색실을 푸오

햇빛보다 더 밝고 정겨운 그늘에
시냇물은 찌글찌글 벌레들인 양 속삭이오

 

비 개인 아침 숲 속에 들면

아, 눈물 비린내. 눈물 비린내

나를 찾아오다가 어디만큼 너는

다리 아파 울고 있는가 * 


* 시인들 나라 2

일찍부터 그랬다 하나의 병이었다

또래가 좋은 시집을 내거나 상을 타면 배가 아프고

밤에 잠자리까지 불편한 고질병

오락가락 꿈도 이상한 꿈을 꾸곤 했다

 

젊었을 때는 문학지에서 또래가 좋은 시 한 편
발표하는 것만 보아도 쩌르르

가슴에 감전이 오는 듯 저려오곤 했다
그렇게 살면서 나이를 먹고 이 모양으로 늙어버렸다

 

이 부질없는 일 부질없는 근심과 걱정
이쯤에서 헤어나고 싶다
얼마 전 선생이란 이름은 벗어버렸지만
시인이란 이름도 벗어던져야 할 허깨비다

 

시인이란 이름을 벗어서 길바닥에 팽개치긴 좀 뭣하고
누군가에게 주어야 할 텐데 누구에게 준다?
나무에게 줄까 바람에게 줄까 흰구름에게 줄까
패랭이꽃한테 민들레꽃한테 맡길까

 

아무래도 새들한테 주는 게 가장 모양새가 좋을 듯 싶다
새들한테 준다면 꾀꼬리? 뻐꾸기? 비둘기? 물총새? 도요새?
그렇다면 나는 어떤 종류의 새였을까

 

또 그 짓이다, 그 짓! 도루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아, 이것도 끝내는 그만두어버리자
나는 참 어쩔 수 없는 얼치기 인간인 모양 * 

 

* 시인들 나라 4
괜찮은 시인, 서정주와 박목월을
욕하는 사람이 있었다
숨어서 오랫동안 그 시인들을
혼자서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얼마 뒤에 보니 그들이 서툴게
서정주와 박목월 흉내 내고 있었다
더러는 시인 정지용을
헐뜯는 축들도 있었다
뒷북치는 인간들이다 *

 

* 희망  

날이 개면 시장에 가리라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힘들여 페달을 밟으며
 
될수록 소로길을 찾아서
개울길을 따라서
흐드러진 코스모스 꽃들
새로 피어나는 과꽃들 보며 가야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자전거에서 내려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할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휘파람이라도 불 것이다
 
어느 집 담장 위엔가
넝쿨콩도 올라와 열렸네
석류도 바깥세상이 궁금한지
고개 내밀고 얼굴 붉혔네
 
시장에 가서는
아내가 부탁한 반찬거리를 사리라
생선도 사고 채소도 사 가지고 오리라 *

 

*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 바람소리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쭉지가 떨어져 있다 
어린 날 뒤울안에서
매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네집 심청이
빌어먹으러 나가고
심봉사 혼자 앉아
날무처럼 끄들끄들 졸고 있는 툇마루 끝에
개다리소반 위 비인 상사발에
마음만 부자로 쌓여주던 그 햇살이
다시 눈 트고 있다, 다시 눈 트고 있다 
장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내 어린 날 여름냇가에서
손바닥 벌려 잡다 놓쳐버린
발가벗은 햇살의 그 반쪽이
앞질러 달려와서 기다리며
저 혼자 심심해 반짝이고 있다 
저 혼자 심심해 물구나무 서보이고 있다

* 나태주시집[너도 그렇다]-종려나무


* 가족

펄렁!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말했다

잘 있어, 나 먼저 가

 

펄렁!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말을 받았다

같이 가, 나도 지금 갈 거야

 

지나는 바람이 귀 기울였다

 

땅바닥이 부드러운 품을 열어

안아주고

햇빛은 또 쓸쓸한 이불을 꺼내어

그들을 덮어주었다 * 

 

* 멀리서 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 아내 
이 지푸라기 머리칼을
언제 또 쓰다듬어 주나?

짧은 속눈썹의 이 여자 고요한 눈을
언제 또 들여다보나?

작아서 귀여운 코
조금쯤 위로 들려 올라간 입술

이 지푸라기 머리칼을 가진 여자를
어디 가서 다 만나나? *

 

* 수호천사

오래 전부터 아내는 우울증 환자였다
내가 병원을 다녀오고 나서 더 심해졌다
약으로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일 년을 넘긴 어느 날

누구에게 들었는지 아내는 말했다
우울증이 나으려면 가족 가운데 한 사람
수호천사가 있어야 한대요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무슨 일이든 도와주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대해주는 천사가
있어야 한 대요
이제부터는 당신이 천사가 되어주어야 해요
천사? 날더러 천사가 되라고?
그 뒤부터 아내는 아예 날더러 천사라고 불렀다
이봐요 천사, 이것 좀 도와주세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아내가 날더러 천사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아내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었다
다시 예전의 그 순하고 느긋하고 편안한
사람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 그렇군요 제가 그동안
천사하고 살았었군요
아내가 바로 아내의 수호천사였다 *

 

* 서해 창망

저렇게 많은 술을 누가

엎질러놓았나?

저렇게 많은 별들을 누가

쏟아놓았나?

 

술 없이도 마음의 고삐가 풀려

바람 따라 멀리까지 보냈다가

갈매기 시켜

불러들이기도 하는데

 

커다란 술잔을 이편으로 기울였다

저편으로 기울였다 하는

아지 못할 손을 문득 나는

만나보고 싶어진다 *

* 나태주 시집[시인들 나라]-서정시학

출처 : 숲속의 작은 옹달샘
글쓴이 : 효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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