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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懷古跡 五首

등경 2023. 5. 26. 10:22

詠懷古跡 -1 영회고적 -1
 
支離東北風塵際 漂泊西南天地間
지리동배풍진제 표박서남천지간
 
三峽樓臺淹日月 五溪衣服共雲山
삼협누대엄일월 오계의복공운산
 
羯胡事主終無賴 詞客哀時早未還
갈호사주종무뢰 사객애시조미환
 
庾信生平最蕭瑟 暮年詩賦動江關
유신생평최소슬 모년시부동강관
 
고적을 읊음 -1
동북의 전란 속에 제각기 흩어져서
서남의 천지에서 떠돌아다니네.
삼협의 루대에서 오랜 세월 보내고
오계의 옷을 입고 운산을 함께 하네.
갈호의 임금 섬김 끝내 교활하더니
시인은 때를 슬퍼해 아직 돌아오지 못하네.
유신의 한평생이 가장 쓸쓸하고
늘그막에 시부가 강관을 뒤흔드네.
 
☞ 參考事項(참고사항)
회고(懷古) 오수(五首)는 모두 하나의 고적으로써
한 사람의 고인(古人)을 추도한 것이다.
이 시는 제일(第一)로 유신을 추도한 것이다.
유신(庾信513-581)은
자 자산(子山). 남양 신야(南陽新野:河南) 출생.
총명다재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열독(閱讀)하였으며,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통달하였다.
양(梁)나라의 간문제(簡文帝)가 태자로 있을 때
그의 아버지 유견오(庾肩吾)와 함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그의 문풍(文風)은 서유체(徐庾體)로
일컬어져 후진들이 다투어 학습에 임했다고 한다.
48세 때 원제(元帝)의 명을 받아 북조(北朝)의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억류당하였다. 평생토록 두터운 예우를 받았으나
양나라에 대한 연모의 정을 잊지 못해 그 비통한
심정을 청신한 형식의 시문으로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양나라 시절의 화려한 작풍과는 전혀
그 형식을 달리하는 것으로 남북조의 시문을
집대성하고 당대(唐代) 율시(律詩)의 선구가 되었다.
이백(李白)의 청신성(淸新性)과 두보(杜甫)의 침울성
(沈鬱性)이 상통하는 육조시대 최후를 장식하는
시인이었다. 작품에는 《유자산문집(庾子山文集)》
(20권)이 있다.
 
支離(지리) ; 이리저리 흩어짐.
漂泊(표박) ; 정처 없이 떠돌아다님.
三峽(삼협) ; 사천성(四川省)과 호북성(湖北省) 사이의
세 골짜기.
五溪(오계) ; 귀주(貴州)에 있는 사부(四府)의 송도청(松桃廳).
오랑캐가 사는 곳.
 羯胡(갈호) ; 오호(五胡)의 하나로 흉노(凶奴)의 별종(別種).
無賴(무뢰) ; 교활하고 거짓이 많음.
 
 
 
詠懷古跡 -2 영회고적 -2
 
搖落深知宋玉悲 風流儒雅亦吾師
요낙심지송옥비 풍류유아역오사
 
望千秋一灑淚 蕭條異代不同時
창망천추일쇄누 소조리대부동시
 
江山故宅空文藻 雲雨荒臺豈夢思
강산고댁공문조 운우황대개몽사
 
最是楚宮俱泯滅 舟人指點到今疑
최시초궁구민멸 주인지점도금의
 
고적을 읊음 -2
 
가을에 나뭇잎 떨어지면 송옥의 슬픔을 참으로 알겠는데
그 풍류와 문장도 또한 내 스승이네.
아득해라 천년인데 한 번 눈물 뿌리고
쓸쓸해라 다른 시대 같은 때가 아니라네.
강산의 옛 집에는 부질없는 문장이고
비구름의 거친 양대 그 꿈이 참이련가.
이 모두 초궁과 함께 사라지고 없으니
뱃사공 그 자리 가리키며 아직도 의심하네.
 
☞ 參考事項(참고사항)
 
搖落(요락) ; 나뭇잎이 흔들리며 떨어짐.
宋玉(송옥) ; 사람이름,
가을을 읊어 슬퍼한 九辯(구변)을 지어 망한 나라를
그리워한 대문장가(大文章家).
文藻(문조) ; 시문(詩文)을 짖는 재주.
楚宮(초궁) ; 무산현(巫山縣) 서쪽 고성(古城) 밑에
있는 양왕(襄王)이 놀던 곳.
 
이 시(詩)는 송옥의 문장(文章)을 말한 것이다.
송옥(宋玉)은
굴원(屈原)에게 사사하여 초나라의 대부(大夫)가 되었으나,
뒤에 실직하였다. 굴원에 다음가는 부(賦)의 작가로,
두 시인을 ‘굴송(屈宋)’이라 병칭(竝稱)하였다.
《구변》은 굴원의 《이소(離騷)》와 《구장(九章)》에서
얻은 영향이 강하다. 참언(讒言)으로 충성(忠誠)을 의심받아
쫓겨나게 된 굴원의 심정을 슬퍼하여, 문인(門人)인
송옥이 거기에 가을의 서글픔을 얹어 썼다고 한다.
거기에는 굴원과 같은 정열적인 자기 주장은 없고,
다만 비애의 서정만 있을 뿐이다.
또 부의 재능을 타고나서 《문선》에 실린 작품들은
초왕(楚王)에 대한 풍자도 약간 있을지는 모르나,
미사여구를 구사하여 청각문학(聽覺文學)의 수작(秀作)이라
할 수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추풍사(秋風辭)》나 반악(潘岳)의
《추흥부(秋興賦)》를 비롯하여 후세의 시문과
속문학(俗文學)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중국 비추문학(悲秋文學)의 개조(開祖)로 알려졌다.
 
 
 
 
 
詠懷古跡 -3 영회고적 -3
 
群山萬壑赴荊門 生長明妃尙有村
군산만학부형문 생장명비상유촌
一去紫臺連朔漠 獨留靑塚向黃昏
일거자대연삭막 독류청총향황혼
 
畵圖省識春風面 環佩空歸月下魂
화도성식춘풍면 환패공귀월하혼
 
千載琵琶作胡語 分明怨恨曲中論
천재비파작호어 분명원한곡중론
 
고적을 읊음 -3
 
모든 산과 골짜기들 형문으로 향하는데
명비가 나고 자란 그 마을 아직 있네.
한번 자대를 떠나 삭막으로 이었나니
홀로 남은 무덤만이 황혼을 바라보네.
봄바람에 고운 얼굴 아무렇게나 그렸거니
달밤에 돌아온 혼 환패 소리 부질없네.
천년의 비파 소리 호인의 말뿐인데
분명히 원한이 곡 속에 하소연하리.
 
☞ 參考事項(참고사항)
 
荊門(형문) ; 산 이름.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에
있음.
明妃(명비) ; 왕소군(王昭君)을 말함.
朔漢(삭한) ; 북방의 사막(沙漠).
 
이 시(詩)는 왕소군(王昭君)을 추도한 시이다.
왕소군(王昭君)은
이름은 장(輓·檣 ·牆). 자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으나 대부분은 사실(史實)로 인정할 수 없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坵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詠懷古跡 -4 영회고적 -4
 
蜀主征吳幸三峽 崩年亦在永安宮
촉주정오행삼협 붕연역재영안궁
 
翠華想像空山裡 玉殿虛無野寺中
취화상상공산리 옥전허무야사중
 
古廟杉松巢水鶴 歲時伏臘走村翁
고묘삼송소수학 세시복엽주촌옹
 
武侯祠屋常 ?近 一體君臣祭祀同
무후사옥상인근 일체궁신제사동
 
고적을 읊음 -4
 
촉주가 오를 정벌하러 삼협으로 갔으나
죽을 때도 또한 영안궁에 있었네.
생각하면 천자기는 산에 나부꼈는데
옥전은 허무하여 야사들 속에 있네.
옛 사당의 소나무에는 수학만이 깃들었고
여름겨울 제사 때는 촌로들만 달려가네.
제갈무후 사당이 항상 곁에 있거니
군신은 한몸이라 제사 또한 다 같다네.
 
☞ 參考事項(참고사항)
 
蜀主(촉주) ; 촉(蜀)의 선주(先主) 소열제(昭烈帝)를
가리킴.
吳(오) ; 오(吳)의 손권(孫權)을 말함.
永安宮(영안궁) ; 선주(先主)가 패전하여 분사한
궁전으로서, 제갈량이 그의 유명을 받은 곳.
翠 (취졸) ; 천자의 기. 푸른새의 깃으로 장식하였음.
 
이 시(詩)는 선주(先主)를 읊은 것이다.
선주(先主)는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 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關羽)·장비(張飛)와
결의형제 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뒤 공손 찬에게 의탁하여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조조(曹操)와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196년 원술(袁術)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鎭東將軍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下??)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객장(客將)이 되었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 양(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 침입을 기도하자,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촉(蜀)에 들어가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패사하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曹丕)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讓位)를 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 양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詠懷古跡 -5 영회고적 -5
 
諸葛大名垂宇宙 宗臣遺像肅淸高
제갈대명수우주 종신유상숙청고
 
三分割據紆籌策 萬古雲 一羽毛
삼분할거우주책 만고운소일우모
 
伯仲之間見伊呂 指揮若定失蕭曹
백중지간견이려 지휘야정실소조
 
運移漢祚終難復 志決身殲軍務勞
운이한조종난복 지결신섬군무노
 
고적을 읊음 -5
 
제갈의 큰 이름은 우주에 늘 빛나고
종신의 남은 상은 엄숙하고 청고하네.
삼분 할권의 큰 포부를 못 폈으나
만고 구름 하늘의 하나의 우모였네.
백중의 사이로는 이여를 보겠거니와
지휘 안정에는 소조도 못 따르리.
시운이 떠나 한나라의 복조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지만
군무에 시달리며 뜻의 결정에 그 몸을 죽이었네.
 
☞ 參考事項(참고사항)
 
遺像(유상) ; 죽은 뒤에 남은 상(像)
伯仲(백중) ; 맏형과 그 지차. 즉 서로 비슷하여 우열이 없음.
蕭曹(소조) ; 소하(蕭河)와 조참(曹參). 모두 한고조의 명신.
소하는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다스리고 한후가 된 사람이요,
조참은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평양후가 된 사람.
 
이 시(詩)는 제갈량(諸葛亮)을 추도한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은
자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山東省 沂水縣) 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 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 ·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 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陝西省 톱縣)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 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꽃물논술모듬에서 복사
박왼식 한시 줌 특강에서 영회고적 오수를 배우고 있음
 
202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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