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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봄을 기다리며..봄 시 모음

등경 2017. 3. 1. 22:12

봄을 기다리며..봄 시 모음

  곽재구

 

다시 그리움이 일어

봄바람이 새 꽃가지를 흔들 것이다

흙바람이 일어 가슴의 큰 슬픔도

꽃잎처럼 바람에 묻힐 것이다

진달래 꽃편지 무더기 써갈긴 산언덕 너머

잊혀진 누군가의 돌무덤가에도

이슬 맺힌 들메꽃 한 송이 피어날 것이다

웃통을 드러낸 아낙들이 강물에 머리를 감고

5월이면 머리에 꽂을 한 송이의

창포꽃을 생각할 것이다

강물 새에 섧게 드러난 징검다리를 밟고

언젠가 돌아온다던 임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보리꽃이 만발하고

마실 가는 가시내들의 젖가슴이 부풀어

이 땅위에 그리움의 단내가 물결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곁을 떠나가주렴 절망이여

징검다리 선들선들 밟고 오는 봄바람 속에

오늘은 잊혀진 봄 슬픔 되살아난다

바지게 가득 떨어진 꽃잎 지고

쉬엄쉬엄 돌무덤을 넘는 봄

 

 

 

      김기림

 

4월은 게으른 표범처럼

인제사 잠이 깼다

눈이 부시다

가려웁다

소름친다

등을 살린다

주춤거린다

성큼 겨울을 뛰어 넘는다

1946년 발표

 

 

 

 

봄    김기택

 

바람 속에 아직도 차가운 발톱이 남아있는 3월

양지쪽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햇볕에 살짝 녹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한다

힘껏 앞으로 뻗은 앞다리

앞다리를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뒷다리

그 사이에서 활처럼 땅을 향해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

고양이 부드러운 등을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

새순 돋는 가지를 활짝 벌리고

바람에 가파르게 휘어지는 우두둑 우두둑 늘어나는 나무들

 

 

 

 

             김광섭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인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랑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봄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봄            서정주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색 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도라...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좀 슬픈 일좀, 있어야겠다

 

 

           손동연

 

개나리

노오란 덧니가 반짝인다

 

햇볕도 앞가슴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무용시간이 끝났는지

신발 주머니를 든 채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유치원 뜰이다

 

 

 

 

봄             오탁번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 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유안진

 

저 쉬임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 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 났음이랴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랭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따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짜기에는

뻐꾹뻐꾹 사랑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럼증, 산 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빛 봄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도르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봄                  정지용

 

외ㅅ가마귀 울며 나른 알로

허울한 돌기둥 넷이 스고

이끼 흔적 푸르른데

황혼이 붉게 물든다

 

거북 등 솟아오른 다리

길기도 한 다리

바람이 수면에 옴기니

휘이 비껴 쓸리다

               <동방평론> 1호 1932년 4월호                           

 

 

 

 

   봄          천양희

 

그 자리가 비었어도 밖엔 봄이 충분하였다

나 혼자 있어도 밖엔 봄이 충분하였다

충분한 봄으로 그 시간을 채웠다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작가.2003년

 

 

                         라일락

 

 

봄             홉킨스

 

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이름 없는 풀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파릇파릇 아름답게 자라고

티티새의 알은 낮은 하늘 갈아 티티새 자신은

메아리치는 숲을 노래로 울리며 귓전은 때려

그 소리를 들으며 벼락을 맞은 듯하고

윤기 도는 배나무 잎사귀와 꽃잎은

하늘을 닦아 내어 푸르름이 다가오는 풍요로움

뛰노는 어린 양들은 깡충 거리나니

이 생기 넘치는 활력과 기쁨은 무엇이던가

에덴 동산에서 비롯된 대지의 감미로운 흐름이니

그것을 차지하여라, 소유하거라, 그것이 죄 때문에

싫어지고 흐려지고 더러워지기 전에,  주 그리스도여

소년 소녀가 지닌 바 티 없는 마음과 5월의 날을

동정녀의 아들이여

당신이 선택하시고

그 무엇보다도 값어치 있는 것을 가지게 하라

 

Gerard  Hopkins(1844-1889) 영국의 성직자이며 시인

 

 

 

 

                황인숙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를 부풀어

기쁘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한 발 물러나

고막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작은 거품들이 눈을 트는 것을 본다

 

첫 뻐꾸기 젖은 몸을 털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고흐 ㅡ  복숭아꽃

 

 

봄날              김종길

 

골목의 흰 목련 꽃송이

수틀 위에서처럼

눈을 뜨고

 

한나절 젖빛 운애 속에

몸풀고 돌아누운

북한사

 

번데기처럼 나온 애벌레인가

나도 꿈틀거린다

눈을 뜬다

 

 

 

 

봄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 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볕에 못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 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봄날           김용택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 잡고

매화꽃 보러 간 줄 알아라

 

 

 

 

봄날          송수권

 

앵두꽃이 피었다 일러라 살구꽃이 피었다 일러라

또 복사꽃이 피었다 일러라

할머니 마루 끝에 나앉아 무연히 앞산을 보신다

등이 간지러운지 자꾸만 등을 긁어신다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라고 말하는 사이

그 앞산에도 진달래꽃 분홍 불이 붙었다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죽한 뱃고동이 운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울고 야야, 쭈꾸미     왱병 ㅡ 식초병

배가 들었구나 , 할머니 쩝쩝 입맛을 다신다

빙초산 맛이 입에 들척지근하고 새콤한 것이

달기가 햇뻐꾸기 소리 같다

 

아버지 주꾸미 한 뭇을 사오셨다 어머니 고추장

된장을 버물 또 부뚜막의 왱병을 기울이신다

주꾸미 대가리를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  아버지 하신 말씀

니 할매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환장한 환장한 봄날이었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떨고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즉한 뱃고동이 울었다

 

 

 

 

 

봄날           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데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왔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 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리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와왔데

 

 

                             밀레 ㅡ 돼지 잡는 사람들

 

 

봄날        신경림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 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이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살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봄날            심재휘

 

새들이 깃털 속의 바람을 풀어내면

먼 바다에서는 배들이 풍랑에 길을 잃고는 하였다

오전 11시의 봄날이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는 것은

저 작은 새들이 바람을 품으며 날기 때문인 걸

적막한 개나리 꽃 그늘이 말해줘서 알았다

이런 때에 나는 상오의 낮달보다도 스스로

민들레인 그 꽃보다도 못하였다

나를 등지고 앉은 그 풍경에

한엇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는 바보 같았다

 

 

 

 

봄날           이동순(1950 - ) 김천.

 

꽃은 피었다가

왜 이다지 속절없이 지고 마는가

봄은 불현듯이 왔다가

왜 이다지 자취없이 사라져버리는가

 

내 사랑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모두 이렇게 다 떠나고

끝까지 내 곁에 남아 나를 호젓이 지키고 있는 것은

다만 빈 그림자뿐이려니

그림자여

너는 무슨 인연 그리도 깊어

나를 놓지 못하는가

 

이 봄날엔 왜 그저

모든 것이 아쉬웁고 허전하고 쓸쓸한가

만나는 것마다

왜 마냥 서럽고 애틋한가

 

 

 

 

봄날                  이수지

 

기타를 치고 싶었다 日語도 배우고 싶었다

잘래희망 란에는 언제나 디자이너라고 적어넣었다

우리집 가장은 소주병과 약봉지였다

삼청교육대에서 씀바귀 같은 절망을 키우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느 날 소주병이 되어 세상 밖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정부 보조금으로는 뇌종양에 걸린 엄마의 약값조차 보조하기 힘들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빨아 널은 체육복, 하얀 체육복이 벌써 말라기네 ...

봄날이 오긴 왔네, 팔락팔락 ...자꾸 잠이 오네. 운동화는 오래 전에 닳아버렸네...

돈꾸러 갔던 엄마가 때가 훨씬 지나 돌아왔을때

전기밥솥엔 저녁밥이 그득했다

밥은 식어 있고, 전기 코드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불 꺼진 방문 앞에 한참을 목발처럼 서 있었다

 

피자마자 시들은 꽃무리처럼 누렇게 흔들리는 저녁밤

아무도 밥을 퍼먹지 못한 그 밤

꽃잎 같은 밥알들이 흩어지며 소리 없이 강물로 흘러 들어갔다

강바닥에 강물 위에 밥주걱처럼 꽂혀 있는 달빛

바람이 불때마다 수면 위로 무심히 퍼올려지는 밥 냄새 ...같은 봄꽃들

아무리 퍼먹어도 퍼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봄밤

 

 

                   


+== 봄꽃 ==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함민복·시인, 1962-)


+== 봄날 아침식사 ==

냉이국 한 그릇에 봄을 마신다
냉이에 묻은 흙내음
조개에 묻은 바다내음
마주 앉은 가족의 웃음도 섞어
모처럼 기쁨의 밥을 말아먹는다
냉이 잎새처럼 들쭉날쭉한 내 마음에도
어느새 새봄의 실뿌리가 하얗게 내리고 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봄 ==  

물오른 물푸레나무 가지에
젖은 사랑 하나가 걸려 있네

뿌리로 잎들을 만들어
넉넉한 추억을 저장하기 위하여
온몸으로 물을 긷는 나무들

산다는 건 다 물오르는 것

싱싱한 생각들이
익은 세월 앞에 펄펄
꿈이 되어 끓고 있네.


(김시탁·시인, 경북 봉화 출생)


+== 사람들 == 

봄은
얼음장 아래에도 있고
보도블록 밑에도 있고
가슴속에도 있다
봄을 찾아
얼음장 밑을 들여다보고
보도블록 아래를 들추어보고
내 가슴속을 뒤지어보아도
봄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버스,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봄을 보았다
봄은 사람들이었다.


(강민숙·시인, 1962-)


+==  봄날에는 ==

이른 봄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꽃바람이고 싶다

당신의 빛으로 채색된 꽃잎 속을
물결처럼 드나들며
향기로운 은혜의 집을 짓고 싶다

삶의 갈피마다
뽀얀 흙먼지를 씻어내며
봄비이고 싶다

청결한 언어와 마음으로
깨끗한 기도를 드리며
출렁이는 강물로 흐르고 싶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연둣빛 싹을 틔우는
투명한 햇살이고 싶다

따스한 가슴으로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눈부신 환희로 일어서고 싶다        

          
(이영숙·시인, 충북 청주 출생)


+== 봄 소리 == 

닫힌 아파트 창문으로
펑 펑 펑 퉁겨 오는
연식정구공의 소리

하얀 공
하얀 마당
하얀 유니폼
청명 하늘 아래 눈부시다.

펑 펑 펑 바람을 몰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납작하게 기울어져 오가는
연식정구공의 보드라운 소리

그 소리에 여기저기
하얀 목련꽃이 웃음을 터뜨리고
꽉 닫혀 있던 내 귀도
활짝 열린다.


(권달웅·시인, 1944-)


+== 봄비 그리고 아이 == 
          
봄비가 내려서인지
우리 아가들 신나서 뛰어다니네요

주룩주룩 내리는
봄비와 함께 하고 싶은가봐요

화단을 자세히 보세요
우리 아이들을 닮은 새싹이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네요

아직은 부끄러운지
아직은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아주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어요

조심조심 다가가서 살짝 만져줍니다
내 따사로운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김은경·시인, 대구 출생)          


+== 이따금 봄이 찾아와 ==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나희덕·시인, 1966-)


+== 이른 봄 ==

이른 봄
풀은 겨우 고개를 내밀고
시냇물과 햇빛은 약하게 흐르고
숲의 초록색은 투명하다.

아직 목동의 피리 소리는 아침마다
울려 퍼지지 않고
숲의 작은 고사리도
아직은 잎을 돌돌 말고 있다.

이른 봄
자작나무 아래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내리깔고
내 앞에 너는 서 있었다.

내 사랑에게 보내는 응답으로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던 너
생명이여! 숲이여! 햇빛이여!
오오, 청춘이여! 꿈이여!
사랑스런 네 얼굴을 보며
나는 울었노라.

이른 봄
자작나무 아래서
그것은 우리 생애의 이른 봄
가슴 가득한 행복! 그 넘치는 눈물!
숲이여! 생명이여! 햇빛이여!

자작나무 잎의 연푸른 화사함이여!


(톨스토이·러시아 작가, 1828-1910)


+== 봄꽃의 노래 ==  

내가 있어
세상이 밝으니

기분 참 좋다
많이많이 행복하다.

나의 생
비록 짧지만

온몸 바쳐
한 점 불꽃이 되리.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 가슴마다

사랑의 불
활활 지펴주리.


(정연복·시인, 1957-)





+== 풀물 든 가슴으로 ==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
풀빛으로 노래로
물드는 봄

겨우내 아팠던 싹들이
웃으며 웃으며 올라오는 봄

봄에는
슬퍼도 울지 마십시오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 내려오는
저 푸른 산이 보이시나요?

그 설레임의 산으로
어서 풀물 든 가슴으로
올라가십시오


(이해인·수녀, 1945-)


+== 맑다 == 

무슨 소식 올 것 같은
개인 날 맑은 풍경

나뭇잎 사이사이
연둣빛 새소리를

살며시
뜰채로 뜨자
소복이
담기는 봄


(박연옥·시인, 1959-)



+== 버들강아지 == 

시냇가
버들강아지
봄바람이 났나

오동통
살이 올랐네

봄처녀
봉곳한 가슴처럼

살며시 다가가
가만히 귀 대어
봄소식 들어본다.


(우공 이문조·시인)


+== 봄눈 ==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씨.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꽃씨.

흙에 발이 닿자마자
풀씨, 풀꽃씨 내려놓고
보풀보풀 봄눈 숨지고 만다.

숨진 자리마다
풀은 돋아 자라고
눈송이만 한 풀꽃을 매단다.


(이상교·시인, 1949-)


+== 봄에 앓는 병 ==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늦게서야 병이 오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현신하여
지금 나의 사방에 가득했는데
아아, 이 즐거운 시절
나는 누워서
지난겨울의 아픔을 병으로 앓고 있노라


(이수익·시인, 1942-)


+== 봄은 ==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듯이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신동엽·시인, 1930-1969)


+== 봄의 정원으로 오라 ==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잘랄루딘 루미·이란 시인, 1207-1273)


+ 봄의 만찬

흰 접시마다 햇살과 강에서 잘라온 맑은 물,

철쭉 꽃송이와 클로버잎과 강아지풀들,

숲을 지나온 바람 한 줄기를 잡아

가득 차려놓은 식탁에서

그대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먹고 우리가 다시

어른에서 아이로 클 수 있다면

순수와 맑음의 살과 뼈

다시 길러낼 수만 있기를.
사랑을 하기에 앞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만찬을 그대와 즐깁니다.
우리들 사랑이 당신 가슴과 제 마음을

무럭무럭 맑고 착하게 키웠으면 합니다.

(김하인·시인, 1962-)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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