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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화

등경 2013. 9. 25. 17:56

묵화 (墨畵)
- 김종삼(1921~ 84)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시에서 언어의 경제는 인색하거나 옹색한 법이 없다. 상온에 드러나자마자 기화를 시작하는 드라이아이스 같다고 할까. 읽는 이의 가슴에 스며서는 글자에서 곧바로 기체가 된다. 저 ‘민간인(民間人)’이나 ‘장편(掌篇)’ ‘5학년 1반’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말하자면, 우리 시사에서 기화하는 언어를 개발한 것이 그이다. 라디오가 귀를 호사시키는 거의 유일한 경로이던 시절에 시인이 방송국에서 음악 담당으로 요긴했다고 들었는데, 음악에 대한 그만한 조예가 없이는 이만한 회화ㅡ특히 빛깔이란 빛깔은 죄다 바래버리고 가슴에 와서 기화하는 ‘묵화’ 같은 것은 애초에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이미지의 극한도 결국은 그 리듬에 있는 것일 수 있겠다는 앞뒤 없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장철문·시인·순천대 교수]

2013.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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