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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밤

등경 2013. 9. 27. 19:50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1941. 11. 5>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참고자료
윤동주 : (尹東柱 1917-1945) 詩人 아명은 해환(海煥) 만주 北間道 龍井村 에서 출생 연희 전문 문과 일본 立敎대학 同志社대학등을 다니다 1943년 귀향하다가 日警에 체포되어 福岡형무소에서 복역중 45년 2월 사망 遺稿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있다.

아름다운 이상에의 동경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난해함이 없는 산문체의 질서적 표현 기법으로 친근감과 설득력을 더해 주고 있다. 가을 하늘과 별과 시인의 고향이 되어 버린 북간도(北間島)의 이국 정조(異國情調)가 망국(亡國)의 설움과 어울려 민족의 비애가 애잔하게 표현되어 있다.

‘별’은 이 작품의 중심 소재로서 윤동주가 즐겨 사용하는 이상적 이미지이다. 윤동주는 이상과 순수, 구원의 상징인 별을 헤면서 여러 상념에 젖고 시를 떠올리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그가 별을 다 헬 수 없는 것은 그가 꿈꾸는 것이 많기도 한 탓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밤이 빨리 지나가기 때문이며, 번민과 고뇌로 상징되는 젊은 날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별을 헤며 불러보는 아름다운 말들은 ‘추억’(소학교 때 이국 소녀들의 이름), ‘사랑’(벌써 계집애들의 이름), ‘쓸쓸함’(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동경’(비둘기, 노루), ‘시’(‘프란시스 잼’ 시인의 이름)로 상세화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시인이 추구하는 별(이상)처럼 멀리 존재할 뿐이다. 그리움과 쓸쓸함의 근원인 어머니는 북간도까지 쫓겨간 윤동주의 어머니이자 그 곳에 살고 있던 수많은 우리 민족의 어머니들이요, 일제에게 수탈당한 한국인의 상징적 어머니 상(像)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곧, 모국(母國)의 표상인 셈이다. 이제 그는 극도의 순결 의식을 가지고, 지나칠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가 되어 어머니를 부르며 ‘흙으로 덮어 버린’자신의 이름에 절망한다. 그 ‘부끄러운 이름’은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더럽혀진 한국인 모두의 이름이자, 이상에 충족하지 못하는 제 자신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비록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살고 있지만, 먼 훗날 이 땅에 다시 봄이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가 꿈꾸던 이상은 마침내 실현되고,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 그의 무기력했던 삶도 소생, 부활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2013.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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