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6일차(2018. 12. 8 토)
어제 유가이드가 오늘 일찍 떠나야 하기에 6시 반 짐을 꾸려서 프론트로 내려 놓으라고 한다. 7시 15분 피렌체로 출발해야 한다고 하면서 서두르라고 하였다. 3시 반 잠에서 깨었고 카톡으로 사진 받기를 했다. 어제 찍을 사진이 많아서 보내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이후 세면을 했고 타월이 큰 타월 밖에 없어서 큰 타월로 몸을 씻고 황제처럼 닦았다. 예정대로 7시 18분 출발이 되었다. 오늘은 피렌체를 거쳐 밀라노로 가야 한다. 로베르토 기사로 바뀌다.
피렌체는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약 230㎞ 떨어져 있다. 이 시는 공화국, 토스카나 공작령의 수도, 이탈리아의 수도 등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 역사를 이어왔다. 14~16세기에는 예술을 비롯하여 상업·금융·학문 등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했다. 가장 유명한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단테,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및 메디치 가문을 들 수 있다. 관광업이 시 경제활동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전통적인 수공예품인 유리제품과 도자기, 귀금속제품, 가죽제품, 예술 복제품, 연철 및 짚 제품, 고급 의류와 구두 등의 제조업도 이루어진다.
발몬토네 지역에서 오늘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를 태우다. 인상착의가 범상치 않다. 이름은 김경철 가이드인데 중절 모자를 쓰고 목소리가 성악을 한 사람 같게 굵은 톤이 중저음으로 해설을 하는데 이름을 밝히자 마자 로마 역사에 대해 술술 풀어 놓는다. 피렌체가 왜 르네상스를 꽃피웠는지 배경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메디치가와 관련지어 구체적인 설명을 하다.
겨울철이 우기라고 한다. 이탈리아는 12월에서 다음 해 2월까지 이어진다.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발원지지만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다. reborn, rebirth 뜻을 가진 재생이라는 말이다. 이탈리아는 22개 연방주로 구성되어 있다. 라틴어는 알파벳의 기원이다. 로마는 753년에 건국되었다.
토스카나는 이태리 명품의 60%를 차지한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피렌체는 그림을 깔아놓는다. 밟으면 사라고 따라 다닌다. 여행객은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영어는 잘 안 배운단다. 로마는 식민지를 만들거나 속주를 두다. 이집트 동맹국과 함께 고대 로마의 영역이다. 전쟁이 잦아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집을 짓는다. 풍토병도 막고 방어에 유리하여 전쟁의 위험도 줄인다. 로마도 7언덕을 중심으로 발달한다. 로마는 길 옆에 소나무를 심었다. 남의 나라를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소나무를 심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있다.
단테, 마키아 벨리, 페트라르카 등 피렌체 인물이다. 피렌체는 시저가 59년 정복하였다. 아르노강 줄기를 따라 꽃을 심었다. 플로렌티아라 하여 꽃의 도시라 하였다. 476년 로마가 멸망하였다.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때 피렌체나 밀라노는 물자를 공급하였다. 피렌체는 이 때 부를 쌓아갔다. 해안가 직물 공장 양모 산업이 발달하였다. 이집트로도 수출하였다. 이태리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국화는 유도화이다.
콘서트 공연 예절에 대해서도 한 수 가르쳐준다. 브라보(Bravo)는 남자에게, 브라바(Brava)는 여자에게, 브라비(Bravi)는 남자 여자에게, 브라베(Brave)는 여자 복수에게 보내는 찬사란다.
세계사를 가르친 적이 있는 나로서는 귀를 쫑긋 하고 들었다. 도저히 메모를 할 수 없어서 나중에는 녹음을 하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들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녹음하고 싶었다.
피렌체에서 왜 르네상스가 발생한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논하지 않고 르네상스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길게 설명한다.
인터넷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메디치 가문을 이야기하지 않고 르네상스를 말하는 것은 강물이 굽이쳐 흘러내리지 않아도 넓은 바다가 존재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르네상스 하면 피렌체를 먼저 떠올리고, 피렌체 하면 메디치 가문을 먼저 떠올린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니 그들이 새로운 예술과 정신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도나텔로나 미켈란젤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렌체와 르네상스의 길을 탐문하는 관점에서 비아 메디치(메디치의 길)는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찬란한 문명의 대로(大路)다. 모든 르네상스의 길은 메디치의 길로 통한다.
메디치 가문의 역사는 350여 년으로 끝난다. 15세기 초에 발흥하여 18세기 중엽에 가문의 문을 닫으니, 메디치 가문과 연관하여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르네상스라는 유럽의 위대한 시대정신뿐이다. 가문의 근본 출발은 한미하기 그지없었으나 가문의 위세가 정점에 달했을 때는 피렌체의 군주 가문, 교황을 두 명이나 배출한 종교 명문가, 프랑스 왕비를 두 명이나 배출한 정치 명문가, 그리고 유럽의 모든 왕실과 사돈의 인연을 맺는 가문으로 등극한다.
버스 속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다. 녹음을 하여 나중 대충 정리하긴 했으나 정확한 내용 전달은 좀 부족한 거 같다. 녹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쪽은 동로마제국이다. 북쪽은 피렌체, 밀라노 등 도시공화국인 꼬무레를 이루고 있다. 피렌체는 금융업의 중심지로 그 중심에는 메디치 가문이 있다. 르네상스를 말하려면 메디치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북쪽은 랑고바르드라 하여 오랑캐족이다. 프랑크 왕국의 피핀은 로마를 제외한 유럽 전체를 통일하여 로마 교황에게 바친다. 그 대신 교황은 피핀에게 로마 외의 지배권을 인정한다.
피렌체는 양모 산업이 발달한다. 피렌체 사람들은 가죽을 잘 다룬다. 피렌체의 생산은 유럽 전체의 생산과 맞먹는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 2명, 추기경 4명, 왕비 2명을 배출한다. 메디치 가문의 죠반니 메디치(13?? ~ 1429)는 양모길드와 은행 길드 조합의 회원이다. 25세 때 로마은행 업계에서 3위에 랭크된 은행을 갖고 있는 삼촌 은행의 사환으로 들어간다. 32세 때 심촌 은행을 인수하여 39세 때 메디치 은행을 설립한다. 은행을 설립함으로써 돈을 벌기 시작한다. 메디치 은행에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 온다. 발다셀의 코사라는 사람이다. 그는 나폴리 귀족으로 볼로냐 대학의 졸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당시 추기경에 입후보하려고 메디치 은행에 돈을 빌리려 온다. 정치 자금 1만 2천 플로링을 빌려준다. 금화 천개인 천플로링은 궁전 하나를 지을 수 있는 돈이다.
이집트나 유대는 종교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리스는 이성, 철학이 지배하는 사회고 로마는 통치 이념을 법으로 삼고 법을 끊임없이 개선하는 사회다. 로마사회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만든다. 왕은 집정관이라 하여 2명이 집정관이 다스리다. 평민은 끊임없이 귀족과 투쟁을 한다. BC 367년 필라티노 언덕에서 평민들이 스트라이크를 한다. 평민 대표들은 호민관을 세운다. 1년이 지나면 로마 원로원으로 승격하여 귀족과 평민들의 결혼도 허용한다. 로마법은 전 세계를 지배한다. 로마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법이다. 법으로 그리스와 이집트와 유대를 효율적으로 지배한다.
메디치가는 발데살 코사에게 돈을 빌려주고 코사는 추기경에 당선되어 메디치 은행은 부를 쌓아 간다. 코사는 8년 추기경을 교황에 당선된다.
유럽의 13세기는 장원제에 기반한 봉건제도가 지배한다. 십자군 전쟁으로 기사가 많이 죽고 양모 산업이 발달하여 농노도 무너지고 성직자는 몰락하여 사회가 많이 변한다.
이 당시는 교황파와 황제파가 대립한다. 교황이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유폐되어 아비뇽 유수 사건이 발생한다. 이 당시 교황이 로마 교황, 프랑스 아비뇽 교황, 피사에서 뽑힌 교황 세 명이 존재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코사는 피사에서 뽑힌 교황으로 이 세 사람 모두 폐위되고 코사는 메디치 가문에 35,000플로링의 보석금을 내게 하고 풀려난다. 죠반니 메디치에 이어 코시모 메디치가 등장한다. 막대한 보석금에다 코사에게 성 한 채도 지어주고 먹을 것도 풍부하게 해줌으로써 메디치가가 어려질 것이라는 통념을 깨고 메디치 은행으로 유럽의 모든 돈이 더 몰리게 된다. 그럼으로써 메디치가는 더욱 융성해간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열리게 된다. 코시모 메디치는 5개국에 능통하고 플라톤의 이데아에도 심취하게 되어 플라톤 피렌체 아카데미를 만든다.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많은 자료를 구하게 되고 도서관을 짓는 데에도 10만 플로링의 돈을 투자한다. 건물을 지으면 그 안에 채울 회화, 조각 등이 필요함에 따라 예술가를 지원하게 된다. 문학, 철학, 건축, 음악, 미술 등이 발달하게 된다. 그 후손으로 피에르 메디치, 일 마니커 메디치 등이 등장하고 복지에도 60만에다 극빈자에게 4만 포함해서 64만 플로링을 투자한다. 여기에서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피운다.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코시모 메디치가 1년 베네치아로 추방되어 베네치아로 확산되고 메디치가에서 교황 2명을 배출함으로 로마로 번져간다.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독일과 프랑스 영국으로 번져가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화 혜택은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 당시는 전기 자동차만 없었지 호화스러웠다. 메디치 가문은 350년을 이어오다 장카스토네가 사망함으로 메디치가는 문을 닫는다.
(가이드의 설명을 녹음하여 대충 복원하였으나 이해 부족과 녹음상태로 제대로 압축하지 못하였다.)
9시 반 미켈란 젤로 광장에 들르다. 피렌체 시내가 다 내려다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인 13세기말과 14세기초에 중요한 '초기 르네상스'(proto-renaissance)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성(聖) 프란키스쿠스의 급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성 프란키스쿠스는 당대를 지배하던 그리스도교 신학의 형식적인 스콜라주의를 배격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영적인 가치를 설교했다. 성 프란키스쿠스에게 자극받은 이탈리아의 미술가·시인들은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싼 세계에서 기쁨을 추구했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조토(1266/67 또는 1276~1337)의 작품은 명료하고 단순한 구조와 심리적 통찰에 크게 의존하는 새로운 회화 양식을 보여준다.
조토의 작품은 피렌체의 화가 치마부에와 시에나의 화가 두초와 시모네 마르티니 등과 같은 동시대 혹은 그보다 앞선 화가들의 작품이 단조롭고 선을 주로 이용한 장식과 종교적 위계질서를 연상시키는 구성방식에 의존했던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단테 역시 조토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그의 시(詩)는 내면적인 경험과 인간 본성의 다양성과 그 미묘한 차이에 치중하고 있다.
〈신곡〉은 그 구도와 사상면에서 볼 때 중세시대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그 주제에 담긴 정신과 표현의 강렬함은 르네상스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역시 초기 르네상스의 인물로 라틴어 문학을 폭넓게 연구하고 또한 속어를 사용해 작품을 집필했다. 불행히도 1348년 무시무시한 흑사병의 만연과 그에 뒤이은 여러 나라의 내란으로 인문주의 연구의 부활과 조토·단테의 작품에서 나타난 개인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해 점점 증가하던 관심이 침체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이 다시금 그 면모를 드러내게 되는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401년 피렌체에서는 산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을 놓고 경합이 벌어졌다. 금세공사이자 화가인 로렌초 기베르티에게 고배를 마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는 로마로 가서 고대 건축과 조각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이들이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들의 지식을 이용해 작품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합리적인 성격의 고대 세계의 미술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는 마사초(1404~28)였다. 마사초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착상의 총명함과 훌륭한 구성, 자연주의 기품의 높은 수준 등은 그를 르네상스 회화에서 중추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마사초에 이어 출현한 화가들, 즉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 등은 선과 공간을 이용한 원근법과 해부학 연구에 치중하면서 과학적 자연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피렌체의 독특한 상황은 미술의 발전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르 산 미켈레로 알려진, 곡물거래소에 벽감(壁龕)장식으로 기베르티와 도나텔로가 제작한 도시의 수호성인(聖人)조각상과 고대에 세워진 피렌체 대성당에 브루넬레스키가 건축한 거대한 돔은 피렌체 시민들의 자랑이 되었다. 궁전과 교회, 수도원 등을 건축하고 장식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부유한 상인 가문들이 지불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가문이 바로 메디치가(家)였다.
메디치가는 유럽의 모든 주요도시를 상대로 무역을 했다.
북구 르네상스 미술의 최대 걸작품 가운데 하나인 휘고 반 데르 구스의 작품 〈포르티나리 제단화 The Portinari Altarpiece〉는 메디치가의 대리인 톰마소 포르티나리의 의뢰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템페라 화법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매끄러운 표면에다 보석과 같은 색감을 내는 반투명 유화물감으로 채색된 작품이다. 초기 북구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과학적인 원근구도와 해부학에 관한 연구보다는 물체와 그 물체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재생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탈리아 중부의 화가들은 1476년 〈포르티나리 제단화〉가 피렌체에 소개된 직후 유화 물감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성기(盛期)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시기는 1490년대 초반에서부터 로마가 제국군대에 의해 약탈당한 1527년까지 대략 35년간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미술은 3명의 위대한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에 의해 꽃을 피웠다.
이들은 각자 이 시기의 중요한 양상을 작품으로 구체화시켰는데, 특히 다 빈치는 바로 르네상스인(人) 그 자체였으며 외따로 우뚝 솟은 천재였다. 그는 어떠한 연구분야도 낯설게 여기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감동적인 표현을 위한 궁극적인 수단으로, 그 인체에 관한 영감을 끄집어내는 거대한 계획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창조적인 힘을 마음껏 발산했다. 라파엘로는 고전적인 정신, 즉 조화와 미, 잔잔함 등을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들을 그려냈다.
다 빈치는 당시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해부학을 비롯해 비행(飛行)의 성질, 동·식물 생명체의 구조에 대한 쉴새없는 연구 때문에 그림 그리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모나리자 Mona Lisa〉(1503~05, 루브르 박물관 소장), 〈암굴의 성모〉(1485경, 루브르 박물관 소장), 심하게 손상된 프레스코 〈최후의 만찬〉(1495~98,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소장)이 특히 유명하다.
〈피에타〉(1499,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다비드〉(1501~04, 피렌체 아카데미아 소장)와 같은 미켈란젤로의 초기 조각품들은 더욱 풍부한 표현력을 발휘하기 위해 구조와 비례의 일반적인 규칙들을 어기면서 조화를 이루어내는 배치를 완성, 숨막힐 듯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의 최고 역작은 로마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대규모 천장 프레스코이다. 이 천장화는 1508~12년의 4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新)플라톤 사상을 융합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철학적으로 통일된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라파엘로의 대표작 〈아테네 학당〉(1508~11)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던 것과 같은 시기에 바티칸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대규모 프레스코인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와 플라톤 학파의 사상적 대표자들을 함께 담았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화면구도가 빽빽히 차 있고 표면이 거친 반면 라파엘로는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아치가 있는 넓은 회당에 위치시켜 멀리 물러나 있도록 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본래 다 빈치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에 나타난 피라미드식 구성과 미모의 얼굴생김새를 자신의 성모마리아 그림들에 구현시켰다.
그러나 그는 많은 수의 작품과 침착한 기질, 고전적 조화와 확실성을 선호하는 성향 등으로 다 빈치와는 구별된다.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는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이다. 그는 1499년 55세 때 로마에 왔다. 로마에서 제작한 최초의 걸작품인, 산피에트로인몬토리오 교회에 있는 템피에토(1502)는 고대 신전건축물들을 떠올리게 하는 중앙집중식 돔 구조물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3 재위)는 브라만테를 교황청 건축가로 임명하고 4세기에 세워진 성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는 계획을 그와 함께 구상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브라만테가 죽은 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마무리되었다.
성기 르네상스의 강력한 교황들인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치하에서 인문주의 연구가 계속 진행되었으며 이와 함께 다성(多聲)음악이 발달했다.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봉사하던 시스티나 예배당의 성가대는 이탈리아 전역과 북유럽에서 모인 음악가·성악가들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작곡가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조스켕 데 프레(1445~1521), 팔레스트리나(1525~84)가 있다.
통일된 역사의 한 기간으로서의 르네상스 시기는 1527년 로마의 몰락으로 끝났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전 인문주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16세기 후반 마니에리스모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으로 생기를 얻은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북유럽에서 계속 탄생했다.
형식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던 코레조(1494~1534)와 티치아노(1488/90~1576)와 같은 북부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외형상으로 감정의 혼란 없이 비너스와 성모마리아를 동시에 찬미하곤 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에 의해 북부 이탈리아에 도입된 유화기법은 습한 기후 때문에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할 수 없었던 베네치아의 화가들에 의해 빠르게 수용되었는데 이러한 유화기법은 다혈질에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베네치아인들의 문화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조반니 벨리니, 조르조네,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와 같은 화가들은 베네치아의 회화양식을 계속 발전시켜나갔다.
베네치아의 회화 스타일은 세속적인 내용의 주제, 관능적인 색감과 표면처리, 그리고 화려한 배경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지적인 분위기에 가깝게 근접한 15세기의 인물은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이다. 뒤러는 시각적인 실험과 자연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나갔으며 동판화와 목판화를 이용해, 르네상스와 북구의 고딕양식을 박력있게 융합시켜 서구세계에 확산시킨 예술가였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
10시 48분 가이드가 내린다.
도시 진입세를 내기 위해 잠시 내린다고 한다. 모두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를 따라 피렌체 도시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다. 대리석 집 바닥에 돌 블록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식당으로 가서 피자로 점심을 먹다.
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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