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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태주 시 모음

등경 2014. 11. 26. 21:42

* 부탁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 보이는 곳까지만
목소리 들리는 곳까지만 가거라
돌아오는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수선화  

언 땅의 꽃밭을 파다가 문득
수선화 뿌리를 보고 놀란다
어찌 수선화, 너희에게는 언 땅 속이
고대광실(高臺廣室) 등 뜨신 안방이었드란 말이냐!
하얗게 살아 서릿발이 엉켜 있는 실뿌리며
붓끝으로 뾰족이 내민 예쁜 촉
봄을 우리가 만드는 줄 알았더니
역시 우리의 봄은 너희가 만드는 봄이었구나
우리의 봄은 너희에게서 빌려온 봄이었구나

 

* 편지

하루의 좋은 시간을
다른 곳에 다 써 먹고
창문에 어둠 깃들어서야
그댈 생각해 낸다
그댈 생각하고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너무 섭섭히 생각 마시압

 

* 가을 안부

그 가을 대덕스님 도솔암 뜨실 때
나무광에 두고 오신 풍란 한 그루
행자들 건사 못해 얼어 죽였을라
노스님은 잠 깨어 그것만이 걱정이시네

 

* 내장산 단풍  
내일이면 헤어질 사람과
와서 보시오

내일이면 잊혀질 사람과
함께 보시오

왼 산이 통째로 살아서
가쁜 숨 몰아 쉬는 모습을

다 못 타는 이 여자의
슬픔을.....

 

* 시

연록색 나무 이파리 사이
요리조리 길을 내며
바람이 간다
바람의 길을 따라
마음도 간다

그처럼
말씀이 가는 길이 있다
소리가 가는 길도 있다

 

*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직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 맑은 샘물 한 모금  

맑은 샘물 한 모금 마시러 십 리를 돌아서 가고
맑은 개울물에 손 씻으러 이십 리를 돌아서 가고
네 목소리 들으러 삽십 리를 돌아갔더니
보리밭 위에 황소만 여물을 씹고 있습데 

 

* 무인도

바다에 가서 며칠

섬을 보고 왔더니

아내가 섬이 되어 있었다

섬 가운데서도

무인도가 되어 있었다

 

* 눈부신 세상
멀리서 보면 때로 세상은
조그맣고 사랑스럽다
따뜻하기까지 하다
나는 손을 들어
세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다가 깨어난 아이처럼
세상은 배시시 눈을 뜨고
나를 향해 웃음 지어 보인다

세상도 눈이 부신가 보다 

 

* 꽃 피는 전화

살아서 숨쉬는 사람인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거기 계신 것만으로도 참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오늘은 전화를 다 주셨군요
배꽃 필 때 배꽃 보러
멀리 한번 길 떠나겠습니다

 

* 안부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 별처럼 꽃처럼

별처럼 꽃처럼 하늘에 달과 해처럼

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조그만 나뭇잎처럼

곱게곱게 숨을 쉬며 고운 세상 살다가리니

나는 너의 바람막이 팔을 벌려 예 섰으마

 

* 앉은뱅이 꽃

발 밑에 가여운 것
밟지 마라
그 꽃 밟으면 귀양간단다
그 꽃 밟으면 죄받는단다

 

* 오동꽃

오동꽃 보랏빛 떠는 하늘빛
오동꽃 보랏빛 조그만 초롱
멀리 있는 너를 두고 나 혼자서
5월 하루 더딘 날 나 혼자서

 

* 많은 걸 알지

많은 걸 알지 않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여러 곳을 돌아보지 않아도 목마름이 없다면
얼마든지 고운 세상을 살 수 있는 일이다
아무한테도 상처 받지 않고 비웃음 당하지 않고

 

* 달 떠올라 잠잠

달 떠올라 잠잠, 먹물 뿌린 대숲 그늘
대숲 그늘 속에 머리 곱게 빗은 초집
그 초집 안방에 수놓는 처녀 길슴한 눈썹 그늘
달빛은 마루 끝만큼 추녀 끝만큼만 왔다가 간다

 

* 꿩꿩 꿩서방

꿩꿩 꿩서방 무얼 먹고 사아나?
아들 낳고 딸 낳고 무얼 먹고 사아나?
눈 온 날은 눈 먹고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마시고
배꼽이나 만지며 그럭저럭 사알지

 

* 까닭없이 심통나

까닭없이 심통나 아버지한테 매맞고
훌쩍이며 얼굴 묻던 어머니의 따스한 등이여
오늘 내 아이놈 난생 처음 종아리 치고
저의 母등에 업혀 훌쩍이는 것을 보고

 

* 빗방울 후둑이는

빗방울 후둑이는 너른 파초 잎을 보노라면
나는 너무 욕심 사납게 살았구나
아무래도 나는 진짜 나의 껍데기가 아닐까
비에 젖어 오히려 싱싱한 파초 잎새가 부럽다

* 산벚꽃나무

뒤로 물러서려다가 기우뚱
벼랑 위에 까치발 재겨 딛고
어렵사리 산벚꽃나무 몸을 열었다
알몸에 연분홍빛 홑치마 저고리 차림
바람에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 벚꽃이 훌훌

벚꽃이 훌훌 옷을 벗고 있었다
나 오기 기다리다 지쳐서 끝내
그 눈부신 연분홍빛 웨딩드레스 벗어던지고
연초록빛 새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는 말씀이예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더불어 약과 더불어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장롱에 비싸고 좋은 옷도 여러 벌 가지지 못한 여자예요.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는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는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니 여자예요. 돈을 아끼느라 꽤나 먼 시장 길도 걸어 다니고 싸구려 미장원에만 골라 다니 여자 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잘 들어 응답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 가슴이 막힐

가슴이 막힐 있습니다

답답해서 숨을 못 쉴 것만 같은 때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당신이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탓으로 섭니다

그렇게는 살지 못하지요

잠시만 당신을 마음 밖으로 나가 살게 할까 합니다

 

소나무 버즘나무 오동나무 줄지어 선 뜨락의 한 구석

당신을 한 그루 감나무로 세워 두려고 그럽니다

매미소리 햇빛처럼 따갑게 쏟아지는 한여름을 그렇

벌 받고 서 계신다면 분명 당신의 가지에 열린 감알들도

조금씩 가슴이 라서 안으로 단물이 들어가겠지요

 

어렵사리 우리의 첫 번째 가을이 찾아오는 날

우리는 붉게 익은 감알들을 올려보며 감나무 아래

오래도록 서 있어도 좋겠습니다

서로의 가슴속에 붉고 탐스럽게 익은 감알들을

훔쳐보며 어린아이들처럼 철없는 웃음을

입술 가득 베어 물어도 좋을 것입니다 

출처 : 숲속의 작은 옹달샘
글쓴이 : 효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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