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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를 하다가

등경 2024. 11. 18. 20:31

도배를 하다가

 

기자명 박석근 작가·문화비평가 입력 2024.11.17 12:51 수정 2024.11.17 16:52

 

도배를 한다

방 보러 와서 잠깐 마주쳤던, 전에 살던 젊은 부부처럼

등이 얇은 벽지를 벗겨내자

한 겹 초벌로 바른 신문이 나온다

 

나는 전에 살던 젊은 부부가 떠나던 날을 기억한다

벽지 뒷면에 바른 묵은 신문처럼

쉽게 찢어지는 청춘을 내면 깊숙이 묻어두고

천천히 돌아서던 그들을 향해

나는 하마터면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할 뻔했다

그들은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어깨를 감싼 채 트럭에 올랐다

사내는 말이 없었고

아이를 안은 여자는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 톤 트럭 짐칸을 반 넘게

쓸쓸함으로 채우고 떠난 그들은

세면대 위에 닳은 칫솔 하나를 남겼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그 위에서 저물어갔던지

칫솔모는 빳빳했던 기억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새로 사온 꽃무늬 벽지를 자르고

풀을 먹여 벽에 바르면서

나는 벽지 뒤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았다

분명 한 시절을 총총히 걸어왔을 각오들이

빛바랜 배경으로 시무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문신(1973~ )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평균 이사 횟수는 7회 정도라고 한다. 이 통계를 다른 각도로 해석하면 30세 전후에 결혼하고 평균 수명이 87세라고 가정했을 때 거의 8년에 한 번 꼴로 이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구나 예순 살이 넘으면 거주지를 잘 옮기지 않는 경향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최소한이다.

 

이 시의 화자(話者)는 주인집 자녀이고, 빈방을 도배한다. 그 방은 얼마 전까지 젊은 부부가 세 들어 살던 방이었다. 화자는 그들이 떠나던 날을 기억한다. ‘일 톤 트럭 짐칸을 반 넘게 쓸쓸함으로 채우고’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아이를 안은 여자는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세면대 위에 남기고 간빳빳했던 칫솔모가 주저앉아 있었다는 진술로 미루어 젊은 부부는 사업에 실패하고 마지못해 방을 뺀 듯하다.

 

이 시의 감상 포인트는 젊은 부부의 애달픈 사연도 사연이지만, 빈방을 도배하면서 그 방에 살았던 젊은 부부를 추억하는 화자의 따뜻한 마음이다.

 

/이욱진 기자

 

 

자유일보 20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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