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 갇히다
정용화
우리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대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겉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방송일시 : 2014년 1월 9일 목요일 밤 12시 30분
▶프로듀서 : 나원식PD
이 시대 빛나는 지성들이 전하는 본격 인문학 강연 프로그램 <인문강단 樂(락)>!
철학자 강신주가 [詩, 철학에게 말 걸다] 강연의 마지막 사물은 [비밀번호]이다.
열리게도 하고 닫히게도 하는 비밀번호에 담긴 이야기를 전한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정용화, <바깥에 갇히다> 中
내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찌 문 뿐이겠는가
우리 모두는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다. 비밀번호는 우리를 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지만, 그 비밀번호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문 밖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정용화 시인의 <바깥에 갇히다>에서 시인은 비밀번호를 잊고 바깥에 갇히게 된다. 바깥에 갇힌다는 표현이 낯설면서도 쉽게 이해되는 이유는 우리도 비밀번호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침전된 역사는 개별자의 내부에 있기도 하고 외부에 있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말하는 성좌constellation적 인식이란 별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별들의 위치도 중요하듯이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역사와 침전물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마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문이 있고, 그 문을 열기 위한 비밀번호가 있다. 그리고 그 비밀번호는 자신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비밀번호는 개개인의 역사와 내면 혹은 외적인 침전물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비밀번호는 계속해서 변한다
우리의 삶이 침전된다는 것은 ‘주름’이 생기는 일이다. 어부의 주름이 바다를 담고 있듯이 주름은 삶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주름을 이해하게 되면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비밀번호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알아내는 것 이상으로 중요시해야 할 것이 있다. 인생의 흐름에 따라 침전물이 쌓이듯이 비밀번호도 계속해서 변해간다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