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마당/좋은 시

한국가사문학관에서

등경 2013. 10. 19. 17:24

1) 떠나라 _고은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이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바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 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2)푸르른 날/ 미당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3)폭설/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4)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5)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6) 정철 / 장진주사(將進酒辭)

한잔 먹새 그려. 또 한잔 먹새 그려. 곳 것거 算(산) 노코 無盡無盡(무진무진) 먹새그려.
이몸 주근 후면 지게 우해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가나, 流蘇寶帳(유소보장)의 만인이 우러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白楊(백양)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해 흰달 가난 비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 할고 하믈며 무덤 우해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찬달 엇디리.

7)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것처럼ㅡ알프레드 디 수지 ㅡ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8)  빙하(氷河) 신석정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년 지구와 주고 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沙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 소리와
뚝 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되어
남은 피 한 천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9)석굴암 대불
- 청마 유치환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니
천 년을 차거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목숨이란! 목숨이란-
억만 년을 원願 두어도
다시는 못 같는 것이매
이대로는 못 버릴 것이매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연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없이 지새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히 눈감고
가부좌跏趺坐 하였노니



10)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 끝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곡조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ㅡ만해 한용운ㅡ


11)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 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 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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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4일에서 18일까지 중등교장 역량강화 3기 직무연수가 있었다. 그 한 가운데 수요일에서 목요일까지 1박2일 체험학습이 있었다. 수요일 첫날 담양군 남면에 있는 한국가사문학관에 들렀다. 가사문학의 이해와 전통의 향기라는 주제로 이정옥 연구원의 강의가 있었다. 여기에서 이정옥이라는 해설가에 주목하고 싶었다. 우린 해설이라해서 많은 해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었다가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유행하는 말처럼 우리를 들었다 놨다 했다.

 

그 분의 네임 카드를 보니 걸어다는 시집, 꽃잎같은 여자, 우리의 한시, 가사와 근 현대시 등을 낭송과 함께 가곡과 대중가요, 성가 등에 가사로 인용된 시어들을 직접 노래와 아리아, 판소리 등으로 시연하는 세계 최초의 모노 포임 오페라(mono poem opera)라고 소개하고 있다. 위에 소개된 시는 그 강사가 성산별곡을 해설하면서 수많은 시를 끄집어 내어 낭송한 시들이다. 제대로 다 옮기지는 못했다. 이 중에 몇 수는 앞으로 외우고 싶은 시들이 있다.

 

지난 8월 정보화 집합연수가 있었다. 그때 마지막 날 특강이 있었는데 박배균이라는 시낭송가가 와서 좋은 시를 낭송했는데 그 때 시낭송이라는 것이 이렇게 감동을 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인연이 되기도 하고 평소 시를 좋아하는 터였는데 우리 교감선생님이 전공이 국어고 또 시를 사랑하는 분이어서 좋은 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시외우기를 시작하면 좋을 거 같아서 이 가을 지금까지 20여수를 외우고 있다. 앞으로 100개의 시를 외우려 한다.

 

공자는 시를 알아야   면(담장 면)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시를 알아야 소통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시의 바탕은 감성이고 이미지이다. 시를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은 마음 속에 좋은 감성과 심상을 갖춰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소통할 수 있다. 시를 마음껏 외워보리라~~~~~~~~~~~~~~~~

 

2013.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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