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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등경 2013. 9. 4. 08:51

가을날
R.M.릴케 (Rilke, Reiner Maria, 1875-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햇볕을 주시어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 속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남아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낙엽이 흩날리는 날이면 가로수 사잇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Rainer Maria Rilke ]

릴케는 체코 프라하에서 지방 철도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프라하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이혼한 후 릴케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독일인 학교에 다녔으며, 12세에는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가지만 그곳 생활은 이 감수성 예민한 소년에게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 때 느꼈던 불안과 외로움 그리고 참담한 기억은 이후 릴케의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릴케는 19세에 사랑에 빠져 수많은 편지와 사랑을 고백하는 시를 쓰기 시작함으로써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스무살에 처녀시집 『삶과 노래』를 자비로 출판하고 다음 해 프라하 대학에서 예술사, 문학사 공부를 시작했다가 곧이어 뮌헨 대학으로 옮겨 예술사, 미학 등을 공부하였다. 이때 릴케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14살 연상의 러시아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난다.

이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기도시집』 등을 발표했으며 5년간에 걸쳐 소설 『말테의 수기』를 완성하고 『형상시집』, 『신시집』 등을 출판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독일, 프랑스, 카프리 섬을 홀로 전전하며 여행을 다녔다. 릴케의 대표작인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완성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23년부터는 백혈병 초기 증세가 나타나 요양소와 뮈조트 성 등에 번갈아 머물렀으며 1926년 백혈병으로 51년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정원에서 장미를 꺾다가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진행된 불치의 병에 스러져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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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릴케의 시가 생각난다. 가을이 되면 항상 생각해보게 되는 시다. 오늘은 이 시를 무작정 외울 생각이다.

 

2013.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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