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마당/좋은 시

반성608

등경 2024. 9. 9. 08:01

반성608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 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나를 놓아 주신다.

 

김영승(1959~ )

 

 

/게티이미지

시집 반성은 같은 제목의 시 82편이 수록돼 있다. 시인은 반성 서()’에서 이 시편들을 서정시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반성은 전통적 의미의 서정시와 거리가 있다. 이 계통의 시인으로 김수영이 있는데 그 특징은 비시적(非詩的)인 생활언어를 시어로 과감하게 수용한 데 있다. 그렇긴 하지만 두 시인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김수영의 시정신은 자유라는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고, 이 자유는 사회비판과 미학을 포함하는 개념인 반면에 김영승 시인은 사회와 역사가 배제된 자유를 거세당한 인간의 자조적 실존의 비극이다. 이러한 비극이 단순히 비극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시작품이 되는 이유는 한 걸음 물러나 자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 예컨대 반성608’에서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 나를 놓아 주신다는 표현이 그렇고, ‘반성99’에서 집을 나서는 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습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처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가 그렇다.

 

반성은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보고 뉘우친다는 뜻이다. 김영승의 시는 반성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반성문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뉘우치는 문구가 단 한 줄도 없다. 그러니까 시인은 애당초 반성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란 제목을 큼지막하게 단 이유는, 세상질서에 순응하지 못하는 게 죄가 아닐진대 사사건건(事事件件) 하는 일에 반성을 강요하는 기성사회 대한 저항을 담은 반어적 표현이다.

 

 

박석근 작가·문화비평가

parao1109@naver.com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2024.9.9

'정보마당 >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도서관  (0) 2024.09.27
대추 한알  (0) 2024.09.23
남으로 창을 내겠소  (0) 2024.09.02
그 섬의 개들  (0) 2024.08.30
그냥, 이라는 말  (0)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