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이 다른 나훈아, 감동의 품격
한 번뿐인 인생, 단 한 번의 무대
글 김민희 기자 | 2020.10.04
나훈아는 ‘가왕(歌王)’이 아닌, ‘가황(歌皇)’으로 불린다. ‘노래의 왕’을 넘어 황제의 수준으로 승격한 모양새다. ‘가황’은 국어사전에조차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누가, 언제부터 이런 타이틀을 붙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훈아의 노래를 보고 듣는 모두 언제부터인가 ‘가황 나훈아’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다.
가황 나훈아의 무대는 차원이 달랐다. 지난 9월 30일 KBS2에서 선보인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여러모로 최근 콘서트와 차이가 컸다. 코로나 시대의 노래의 힘을 전국민은 이미 여러차례 경험해온 터였다. <비긴 어게인>에서 음색 고운 가객들은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무해줬고, <미스터트롯>의 top7 트로트 형제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울한 일상으로 상처진 일상에 연고를 바른 듯 새 살을 돋게 했다.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코로나 19? 이 보이지도 않는 이상한 것 때문에 절대 내가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만에 방송 출연을 결심한 나훈아의 말이다. 긴 침묵만큼 방송 이후의 파장과 영향력도 컸다. 시청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추석 당일인 9월 30일에 KBS2에서 방영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시청률 29.0%(닐슨코리아)를 기록했고, 제작 과정을 담은 10월 3일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 역시 18%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나훈아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23.8%에 달한다. 최근 지상파에서는 보기 드문, 역대급 시청률이었다.
재방송, 다시보기 없는 '단 한 번'의 무대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에서는 나훈아가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쏟아부은 8개월 간의 여정을 공개했다. ⒸKBS2
나훈아의 공연은 ‘단 한 번’의 무대였다. 이 방송을 기획하면서 나훈아는 크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한다. 하나는 자신이 한 말이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방영되면 좋겠다는 것, 또 하나는 재방송이나 다시보기를 제공하지 말아달라는 것.
덕분에 노래 중간중간에 나훈아의 발언이 토씨 하나 편집되지 않고 오롯이 전달됐다. 그래서 “우리 KBS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소리를 듣고 같은 소리를 내는, 이것저것 눈치 안 보고 정말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됐으면 좋겠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가 생길 수 없다”는 발언이 그대로 전파를 탈 수 있었다.
또 하나, 무한복제가 일상이 된 네트워크 시대, 단 한 번의 무대로 기억되는 나훈아의 공연은 감동의 품격이 달랐다. ‘본방사수’가 희귀한 상황이 되어갈 정도로 ‘다시보기’가 일상이 되는 시대다. 지금 놓치더라도 해당 방송사에서, 넷플릭스나 왓차 같은 OTT 플랫폼에서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는 콘텐츠와 그렇지 않은 콘텐츠를 대하는 마음이 같은 순 없다. ‘지금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나훈아의 공연은 일회성의 아쉬움과 희소성까지 감동의 요소로 끌어들였다. 2020년 코로나 시국의 한가운데에서 한가위를 지내는 시청자들의 지치고 간절한 마음까지 말이다. 딱 한 번뿐인 인생에서 한 번뿐인 무대를 통해 그는 생의 유한성까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노 개런티 출연, 명언 제조기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비대면 공연에 노 개런티로 출연한 나훈아. 그는 스페셜 방송에서도 여러 명언을 남겼다.
1966년에 데뷔, 데뷔 55년차 베테랑임에도 그는 “연습만이 살 길이고, 연습만이 특별한 것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또 제작진이 “어떤 가수로 남고 싶은지” 묻자 “우린 유행가 가수다, 남는 게 웃기는 것”이라며 “‘잡초’ 부른 가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부른 가수,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기억되면 좋겠다). 뭘로 남는다는 자체가 좀 웃기는 얘기다. 그런 거 묻지 마소.”라고 답했다.
나훈아는 무대에서만 노래를 부른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공연을 청할 때에도 역시 거절하면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표를 끊어라.”
‘가황 나훈아’는 자신의 소신과 방향성이 뚜렷했다. 예술가이지만 ‘대중 예술가’임을 잊지 않았고, 톱스타이지만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유행가 가수’임을 잊지 않았으며, 노래부르는 걸 좋아했지만 ‘무대 위의 가객’으로서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나훈아가 이번 공연 과정에서 적어둔 '기획 노트'. 얼마나 치열하고 디테일하게 준비했는지 한 눈에 보인다. ⒸKBS2
10월 3일에 방영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에서는 이번 공연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나훈아가 쓴 ‘공연 기획 노트’도 화면에 비쳤다. 노트 내용은 디테일의 끝판왕이었다. 부르는 노래 순서부터, 각각의 노래에서 강조할 부분, 중간 멘트까지 보라색, 빨간색, 하늘색, 빨간 펜으로 알록달록 적혀있었다.
나훈아는 무대 위의 가수다.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8개월을 쏟아붓는 그의 열정과 노력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탑클래스 202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