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죽음에 관하여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이들은 모두 죽게 된다. 그동안 태어난 사람들이 다 죽었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오늘 아침 운동을 하러 가면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를 짓누른다.
그 까닭은 오늘 아는 지인의 장례 날이기 때문이다. 엊그제 문자 메시지가 떴다. 삼가 고인 ooo의 명복을 빈다는 부음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분은 지난 1월 정년퇴직을 한 달 앞두고 암수술을 했다. 정년 직전 아들 결혼도 주례를 세우지 않고 양가의 부모 덕담으로 결혼 사회를 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주례자를 세우고 결혼을 시킨 일이 있었다. 그 후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아직 암이라는 것은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운 질병이다. 고인이 걸린 암은 예후가 안 좋아서 생존률이 그리 크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막 인생의 전반전을 마치고 다시 후반전에 들어서기도 전에 하프 타임에 그만 기권해버리듯 인생을 마친 것이다. 사람 모두 장수한다는 보장이 없다. 빨리 죽는 사람도 있고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시편 90편 10절에서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래도 퇴직후 1년이면 너무 애석하다. 십년이어도 그거 아니다는 생각이 든다. 이십년이면 그래도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삽십년이면 서운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시절 종교 시간이 1주일에 한 시간 있었다. 이 시간은 종교 교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인생 전체를 폭넓게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신부님이 들어오셔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원고지 200매 15이상을 과제로 내준 적이 있다. 죽음을 이야기 하면서 ‘죽음이란 게걸스럽게 찾아오는 불청객’이기도 하다는 말은 내 평생 살면서 지워지지 않는 말이다.
어려서 산 너머에 저수지가 있었다. 겨울이면 젊은이가 1년에 한 둘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죽었다는 말이 들리면 그땐 왜 그리 무서웠던지 유년의 추억이 생각난다. 한 해는 육사생도가 애인과 같이 스케이트를 타다가빠져 죽어 푸닥거리를 한다고 온 동네가 떠들썩한 일이 있기도 했다.
오늘 아침 운동장을 돌고 오다. 걸을 수도 있고 숨쉴 수도 있다. 샤워도 하고 아침밥도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글도 쓸 수 있다. 이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동즉생(動則生)이다. 살아 있을 때 감사하고 열심히 살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